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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31. 2024

완장의 사회

저열하고 비열한 정치의 거리에서 

소설가 윤흥길의 작품에 ‘완장’이라는 것이 있다. 요즘에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고 실제로 완장을 두른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에는 학교 규율부도 주번도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기자들도 ‘취재’라고 적힌 완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가 얘기했던 ‘호명’(呼名, interpellation)과 유사하다. 갑자기 웬 철학? ‘호명’은 ‘이름을 부른다’는 뜻 아닌가. 알튀세르는 그것이 누군가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여성은 결혼해서 출산하는 순간 자신의 이름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 대신 ‘~ 엄마’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라지고 어머니만 남는다. 자신은 사라지고 역할만이 남는다. 그렇듯 누군가를 부르고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소설 속 ‘완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과대하게 부풀려 그것을 권력으로 생각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암시한다. 주인공 ‘종술’은 저수지 관리인이 된다. 박봉이었지만 완장의 매력에 혹해 기꺼이 그 일을 맡는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가 새겨진 감시원 완장, 그 서푼 어치의 권력을 얻게 된 종술은 낚시질을 하는 도시의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 부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완장의 힘에 으쓱해진 종술은 면소재지가 있는 읍내에 나갈 때도 완장을 두르고 활보한다. 심지어는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금지하는 지경에 이른다. 역할이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의 맛에 취한 종술은 판단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저열한 우리 모두의 속성일지 모른다. 


새삼 40여 년 전의 소설(1982)을 소환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가 그 천박한 속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를 희화화하고 저열한 것으로 매도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권력을 쥔 몇 사람,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고 일반 국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완장을 차고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있는 동안 국민들은 피폐해지고 그들의 저열한 행위에 무기력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모든 권력은 완장과도 같다. 대통령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모두 자신들이 가진 힘에만 몰두한다. 어떻게 하면 그 잘난 힘으로 으스대고 힘없는 사람을 눌러볼까 고심한다. 입으로 국민을 외치고 민생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하는 짓들은 영락없이 속물들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TV 뉴스를 보기 싫어하고 정치 유튜브들을 혐오하는지 그들은 정녕 모르고 있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선거 때 그렇듯 굽신 대고 웃음 짓던 그들은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돌아서서 약한 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드러낸다. 완장만 보이고 그것을 채워준 사람은 잊어버리는 위선의 얼굴로 돌아볼 뿐이다.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완장들을 쫓아 줄을 서고 그들의 행동에 일희일비한다. 보수니 진보니 떠들어대지만 그런 것들은 책에서나 나오는 관념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가면을 나누어 쓰고 권력과 치부의 방편으로 삼는 모리꾼들만 넘쳐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그들을 따라 국민들이 반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느 한 편을 거들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위 정치평론가들이 늘어서 있다. 아까운 전파를 낭비하면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해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견디기 힘든 소음이다. 자신이 마치 무슨 신이라도 된 듯 말도 안 되는 법조문을 가리키며 죄인도 아닌 사람들에게 호통치고 안하무인의 언사를 일삼는 완장 두른 어떤 국회의원, 일시적인 완장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파는 정치가들 , 국민들의 믿음을 뒤로하고 자신의 권위와 고집만 내세우는 권력자들, 같은 정당 안에서 자신들의 패거리를 위해 상대를 헐뜯는 친* 파벌들... 우리 사회는 이런 완장들로 넘쳐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하찮은 것인지를 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소설 속의 종술은 ‘완장의 허망함’을 일깨우는 술집 작부 부월이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완장을 저수지에 버린다. 두 사람이 떠난 저수지 수면 위에는 버려진 완장만이 떠다닌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나지만 나는 여전히 삭막한 우리의 현실만을 목도할 뿐이다. 종술만도 못한 정치인들과 그들 주변을 배회하는 부나비들은 언제나 깨닫게 될까? 비난과 경멸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중언부언하는 것은 안타까워서다. 완장이 떠도는 저수지에 한탄만이 맴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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