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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28. 2024

섹스 계약설

사람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짝짓기 즉 섹스를 한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 혹은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 섹스는 새들도, 벌들도 사람들도 태초부터 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섹스가 오랜 세월을 통해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변하기는 했을까? 현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많이, 더 잘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인류는 해부학적으로 10만 년 이상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섹스를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면 동굴 속에 살던 원시인들도, 그 후의 모든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먹고 자는 것만큼이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섹스로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은 우리의 생물학적 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섹스를 좋아하고 혹시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생물학적 필요에 의해 성행위를 하게 된다. 사내아이들의 몽정이나 남녀의 자위행위 역시 그러한 신체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법이다.


사실 성에 대한 관념과 태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행위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남색(男色)이 그러했는데 심지어는 나이 든 남자가 미소년을 육체적으로 탐하는 것이 일종의 교육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의 발목만 보여도 외설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그리스가 19세기의 영국보다 성적으로 더 경도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19세기의 도덕은 단지 사회적인 제약이었을 뿐,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런던에는 세 집 건너 한 집에서 매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50년 전의 인간이 50,000년 전보다 섹스를 더 즐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텍사스 대학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부스(David Buss)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들이 과거보다 성에 대해 개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 전의 사람들보다 더 섹스를 자주 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육체에 적힌; 욕망의 역사“(Written in Flesh; History of Desire)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실 우리의 경험은 생물학적 조건화와 사회적 조건화의 혼합물이다. 육체로부터 욕구가 솟아오르지만, 우리의 마음이 사회가 용인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그나마 남은 욕구들은 문화에 의해 지워진다.”


문화적 규범이 성을 배타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공개적으로 허용된 범위에서 욕구를 발산한다. 가끔 일탈이 있기는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생각은 뱀에 의한 이브의 유혹보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특히 종교는 육체적 욕구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해 왔다.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의 사람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생식을 위한 섹스 외에는 모든 섹스를 죄악시했다. 물론 종교 외에도 성행위를 억제하는 요인들은 다양했다. 당시에 존재한 많은 장애물들 때문이다. 특히 중세 1,000년 동안 겪었던 힘든 노역과 흑사병 등의 질병들은 성행위를 크게 위축시켰다. 고약한 냄새와 가려움 증세들, 성병과 낙후된 의술 등으로 중세의 사람들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산업혁명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 방해 요인들이 제거되기 시작하면서 쾌락에 대한 욕구가 급속히 상승하게 된다.    


많은 역사가들과 심리학자들은 19세기 후반이 서양의 성행위 역사의 분수령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지역에 몰려 살게 되면서 성에 대한 태도는 보다 자유분방해진다. 이후 1960년대 피임약의 보급과 더불어 성의 자유화는 급물살을 탄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쾌락을 추구하고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성에 대한 거침없는 태도가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단지 생식을 위한 것이 아닌 쾌락으로써의 성행위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하지만 섹스의 해방이라는 현대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차이가 존재한다. 언제부터 성행위를 시작하고, 얼마나 개방적이며 성행위의 상대자는 몇 명이어야 하는가는 문화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애 동안 여러 명의 상대자를 갖게 되지만 아직 이에 대해 보수적인 나라들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섹스에 대한 욕구를 지역적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섹스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현대의 다양한 성적자극들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성에 대한 수치와 통계는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생활을 공개하는 것에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성적 욕구에 대한 솔직한 견해들은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영국 브래드퍼드 대학 고고학 교수인 티모시 테일러(Timothy Taylor) 교수는 인간에게 다양한 사회문화적, 종교적 제약이 없다면 그야말로 인간의 성생활은 보노보 침팬지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 침팬지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성행위로 보내는데 그것은 매우 빠르게, 형식적으로, 편안하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사회적 유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도 성행위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침팬지들과 다름없이 행동할 것이라는 것이 테일러 교수의 설명이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침팬지가 하는 것을 인간이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적 욕구는 본능이다. 개인별 차이는 있겠지만 섹스는 욕구를 분출하는 가장 보편적인 출구 중의 하나다. 종교와 도덕과 생활환경에 따라 제약되고 억제될 뿐이다. 또한 자유로운 성행위를 통해 초래될 사회적, 정신적 혼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 스스로 정해 놓은 한계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일 것이라 했던가. 그래서 사회는 계약을 맺고 스스로의 행위를 통제한다. 그것을 사회계약설이라 한다면 그 상당 부분은 아마도 섹스에 대한 계약들이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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