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금 간 꽃병
아교로 붙이고 이어도
실금 사이로 물이 샌다.
흘러나온 물방울이 눈물처럼
햇살에 지친 지붕 위의 눈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나의 암흑 속에는 더 짙은 암흑이 있다.
떨어져 깨어져도 느끼지 못하는
無名 無實 無感의 어둠.
얼려놓은 믿음이 녹아내리듯
그 어둠마저 흘러내릴 때
꽃병은 소리 없이 부서진다.
불신의 조각들을 끌어 모아
새 꽃병을 만들어도
실처럼 가는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세월의 虛像.
무엇을 믿었던가.
무엇을 믿지 않았던가.
그림자만 밟고 살아온 세월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지워진 실체의 진공(眞空).
주지도 받지도 못한 믿음의 파편을
고스란히 온몸에 박아 넣고
빈 몸조차 무거워 흔들리고 있다.
삶은 깨어진 믿음
다시 메우지도 잇지도 못할
호흡, 맥박, 검은 피의 응고.
얽힌 실타래 풀어내듯
인(因)과 연(緣)이 엮어낸 날들이
금 간 꽃병처럼 망연(茫然)하다.
무엇을 믿었던가.
무엇을 믿지 않았던가.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저녁 해는 왜 이리 짧을까.
잊힌다는 것, 남겨진다는 것
금 간 꽃병에 담긴 시든 가화(假花)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