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다시 흐르는 강물일 뿐

by 최용훈

옛 친구와 서초역 부근에서 만났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한참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직장에서 30년 가까이 얼굴을 보고 지낸 터이니 웬만한 허물이나 약점은 공유하는 사이이다.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서로 얘기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국밥 한 그릇을 함께 하고 근처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리 만남의 정해진 코스이다.


대화는 보통 과거의 직장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쉬웠던 일들에 대한 한탄도 섞이고 신나고 재미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최근의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도 나오고 마치 무슨 평론가라도 된 듯 정치문제에 대해 열을 올린다. 평생 가르치는 일에만 종사했던 터이니 교육에 관한 주제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AI가 등장한다. 챗GPT를 이용한 교육 방식이 얼마나 편리하고 유용하고 신기한 것인지를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AI라는 현대의 발명품에 대한 걱정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 나는 AI 이전에 이미 인터넷 웹사이트의 유용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터였다. 과거에는 가르치는 텍스트에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그것을 찾아보고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일상화된 이후에는 무엇이든 입력만 하면 설명이 되니 그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40년 전 ‘타임’(TIME)이라는 영문 시사 잡지를 교재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읽었던 글 가운데 ‘Forbidden City’(금지된 도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문맥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곳저곳 찾아보고 물어봐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도서관으로 달려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진 끝에 그것이 중국의 ‘자금성’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어도 서너 시간은 족히 보냈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 그것을 넘어선 지 한참이 되었다. 샘플 목소리를 녹음하고 강의 텍스트를 입력하면 내 목소리로 강의가 이루어진다. 초중고 학생들의 학원수업에서도 챗GPT를 이용하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된다. 선생님들은 강의보다는 학생들의 학습을 관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이뿐이겠는가! AI가 노래를 작곡하고, 시와 수필을 쓰고, 심지어는 사람과 함께 논문을 쓰기도 한다. 이젠 AI가 주 저자고 사람이 제2, 제3 저자가 될 수도 있다니 이 엄청난 변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최근 과학전문 잡지 ‘네이처’에 충격적인 실험결과가 실렸다. 전쟁, 폭력, 질병 같은 부정적인 데이터가 입력되면 AI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였다.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딥러닝’을 넘어서 이제 AI가 사람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명상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AI가 느끼는 불안의 정도가 감소한다니, 이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수도 있는 사람 같은 기계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친구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AI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AI 시대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의 교육은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일까? 생각 끝에 우리는 아주 작은 실마리를 찾아냈다. 컴퓨터 안에 담긴 수많은 정보들이 매우 편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 AI 역시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 그 유용성이나 잠재력이 다를 것이라는 것. 그러한 차이에 교육이라는 것이 개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문과 출신이라 과학이나 기술 분야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으니 그러한 생각이 타당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억지 안도감에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 AI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측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 간 현대의 과학은 놀라우리만치 발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학의 노예가 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이 주는 엄청난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에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에 속박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결국은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만들어냈으니까. 불과 삼십 년 전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달린 자동차는 거의 없었다. 길을 모르면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찾아보든가 누군가에게 물어야 했다.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애태우던 때도 있었다. 이제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러한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들은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인간의 지각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걱정한다. 책을 읽지 않아 독해력이 떨어진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의 긍정적 효과를 부정할 만한 것일까? 그런 거창한 질문은 차치하고 내가 아주 가끔 느끼는 당혹감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가령 주민 센터에 가서 신청서를 작성할 때 글씨가 자꾸 미끄러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졸필이었나? 글자를 쓰는 것이 힘들어진 내 모습이 어색할 뿐이다.


우리의 삶은 더욱 편해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과 삶의 변화는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이다. 전자기술, 유전공학, 우주과학 등 수많은 과학기술들에 이제 AI가 첨가되었다. 피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알고리즘이 올려주는 영상을 보고 AI가 작곡한 노래를 듣는다. 그것이 나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마치 과거 바보상자라 불렸던 TV가 그랬고, 뜻 모르고 빠져들었던 외국의 팝송이 그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우리는 무언가의 노예로 산다. 주인이 바뀌면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겠지. 좋은 주인을 만나야 될 텐데. 흐르는 강물에 휩쓸리면 발버둥 치지 말라고 했다. 그저 함께 흘러가야 한다고 한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또 무엇의 노예가 되어 두려워할까? AI가 인간의 일을 빼앗아 갈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또 다른 일들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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