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공상

by 최용훈

요즘은 TV,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다.

어쩌면 이리 보고 싶고, 볼 만한 것이 많은지...

인류의 탄생부터 명멸한 제국의 역사들,

철학, 심리학, 정치학, 문학, 없는 게 없다.

하루 종일 강의를 듣다보면 이곳이 대학이다.

다큐멘터리, 강연, 다양한 토크쇼, 이전에

몰랐던 지식과 상식들로 가득하다.

보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구글이나 AI에게 물어본다

어찌나 친절히 대답해 주는지...

드라마나 영화는 또 어떤가!

몇 시간이고 흥분하고 눈물짓다 보면 하루해가 진다.

젊어서 일할 때는 생각조차 못하던 한가로운 삶이,

감탄스러울 만치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하루를 무료할 틈 없이 지켜준다.

그러다 오랫동안 뜸했던 책을 펼친다.

영상과 소리로 듣던 얘기들이 활자로 찍혀있다.

조금 읽다 보니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TV나 스마트폰은 소파에 기대기도 하고

아예 침대에 누워 보기도 하는데 왠지

책은 정자세로 앉아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참을성이 다하면 책을 덮고 시계를 본다.

웬 시간이 이리도 더디게 가나.

같은 공간 같은 내용을 보는데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는 차이가 크다.

예전에 써놓은 글을 뒤적인다, 진부하다.

(손으로 쓴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오전 내내 뇌를 가동한 탓인지 시장기를 느낀다.

교회 간 마누라가 식탁에 덮어놓은 밥그릇,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가지 꺼내어 먹는다.

식곤증이 온다.

낮에 자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터이니

졸린 눈을 비비며 잠시 청소기를 돌린다.

내 책상 밑에는 한 것도 없이 웬 부스러기가

이리 쌓이는지.

침대 옆 책상 뒤로 책장에 꽂힌 책들의

원망스러운 눈길을 외면하고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역시 흥미로운 주제가 곧 화면에 뜬다.

한참을 보다 마침내 글거리 하나가 떠오른다.

컴퓨터를 켜고 생각을 끄적이다 보면 또다시

시간이 여울처럼 속히 흐른다.


혹시 내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을 텐데

내가 너무 나태해진 것은 아닐까?

나의 근면함이 읽어낸 책의 페이지들로,

학생들에게 소리 높여 무언가를 외치던 시간들로

증명되던 시절은 이미 지났나 보다.

이제 새로이 찾아낸 나의 하루 일과는 이전 못지않게

정해진 틀에 갇혀있다.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배우고 있는데 이 허전함은 뭘까?

건너편의 책들이 나를 비웃는다.

언제부터 스마트폰이냐, 언제부터 AI냐

아날로그로 먹고 산 세월이 얼만데

한 순간에 변절자로 바뀐단 말이냐!

장마철 지루하게 오락가락하는 비 탓에

눅눅해진 내 마음에 핑곗거리가 생긴다.

언제부터 에어컨이냐

부채 부치고 선풍기 바람 앞에 코를 들이민 게

얼마나 되었는데.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직도 언어는 유효하다.

들어야 하니까 읽어야 하니까 말해야 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뇌가 언어 없이도 작동하여

읽고 보고 듣지 않아도 생각하고 이해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잠시 졸던 사이에 꿈을 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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