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by 최용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후기 인상파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하지만 그의 내면은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처럼 복잡했다. 그리고 그가 표현의 상징으로 삼았던 그 색채들만큼 다채로웠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숙하고 교양 있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반 고흐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소심한 아이였다. 1853년 네덜란드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자신도 부친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아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혼란 속에서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스스로의 삶을 자살로 마감할 때까지 그는 불확실성과 불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37년의 짧은 생을 번민 속에 마감하고 말았다.


20대 중반을 넘기면서 고흐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화가의 본성을 깨닫는다. 서점 직원, 세일즈맨을 거쳐 벨기에의 암울한 탄광지역에서 설교자로 일하던 그의 삶에 예술적 본능이 끓어오른 것은 그의 천국이며 동시에 지옥이었다. 그는 벨기에에 남아 미술을 공부한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그렸던 그림들은 어두웠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의 흑인 여인들의 표정은 피로에 지친 우울함과 삶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흐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였을까?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들은 마치 탄광의 갱 속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광부의 얼굴로 스며드는 한 줄기 희미한 빛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급박함이 없다. 그 어떤 분노의 표식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무료함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었다.



1885년 그 해, 고흐는 벨기에 북부 앤트워프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17세기를 대표하는 벨기에의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들을 발견한다. 그의 강렬한 색채감과 역동성은 고흐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그로 인해 그는 어둠의 색채에서 밝고 강렬한 빛의 색감을 찾아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1886년 그는 파리로 향하고, 그곳 화랑의 매니저로 일하던 동생 테오를 만난다. 당시 파리에는 인상파 화가들이었던 피사로(Camille Pissarro), 모네(Claude Monet), 고갱(Paul Gauguin)모여 있었다. 고흐는 그들의 기법을 모방한다. 밝은 색채와 가벼운 붓터치로 그는 외부의 대상이 마음속에 와 찍히는 '인상'을 캔버스에 옮겨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초기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좀 더 대담하고 어떠한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그림에 대한 열망이었다.


1888년 그는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사한다. 복잡하고 숨 막히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의 모습을 좀 더 밝은 빛 속에서 보고 싶었을까? 그는 그곳에서 노란색의 허름한 집을 사들여 나름대로 장식을 한다. 물론 무일푼의 그를 재정적으로 도운 것은 그의 동생 테오였다. 고흐는 그 노란 집에 친구 화가들을 불러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화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 집을 그린 고호의 그림은 마음의 평화와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미술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었다.



노란 집의 배경을 이루는 하늘은 왜 그렇게 짙푸른 색이어야 했을까? 마치 밤하늘 아래 조명이 비춘 노란 집을 보는 것 같다. 고흐의 마음에는 여전히 밝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의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흐는 그곳에서 일어날 비극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만났던 고갱이 아를의 노란 집으로 찾아온다. 두 사람의 만남은 미술사의 대사건이기도 했지만 고흐 개인에게는 파멸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고흐의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은 늘 고갱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1888년 어느 날 고흐의 이유 없는 분노에 절망한 고갱은 아를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떠나가는 고갱의 뒤를 쫓아온 고흐의 손에는 면도칼이 쥐어져 있었다. 고갱의 격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결국 자신의 귀를 자르고야 만다. 고갱이 떠난 후 고흐는 광기의 발작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1890년 정신병원에서 나온 고흐는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파리 근교 오베르라는 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여정 중에 그는 스스로에게 총을 쏴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그 사건 두 달 후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천재 화가의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10여 년 전 그의 자살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스티븐 나이페와 화이트 스미스라는 퓰리처 상을 받은 두 명의 유명 작가가 10여 년에 걸쳐 고흐의 편지 등을 조사한 끝에 그의 총상은 자살시도가 아니라 두 명의 10대 청소년들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총의 발사로 고흐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한 것이다. 고흐는 두 청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사실을 숨겼었다는 얘기다.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에 따르는 의혹은 자주 제기된다. 물론 두 작가의 연구는 비교적 사실에 입각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지만 고흐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때, 그의 죽음은 삶의 현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던 그의 마지막 선택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불과 10년 정도로 너무 짧았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죽기 전 불과 3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었다. 그는 생전에 화가로서의 성공을 누리지 못한다. 평생 단 한 편의 작품만을 팔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극심한 곤궁함에 빠져있었다. 그를 재정적으로 도운 것은 그의 동생 테오뿐이었다. 그나마도 미술도구, 커피와 담배값으로 사용했고 결국 그는 극심한 영양실조와 정신적 발작과 과로에 시달렸던 것이다.


고흐의 붓터치는 인상적이었다. 색채는 강렬했고 긴장감이 가득했다. 고흐의 그림은 그 형식과 내용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다 극적이고, 감성적이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광기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신의 자각을 캔버스 위에 표현하려는 투쟁이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넘어서 그는 예술의 세계에 영원한 유산을 남겼고, 현대 회화의 근본을 세우는데 기여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이 가장 고가로 경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화가로서의 무게감을 더하지는 못한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었던 혼돈의 세계에서 그는 지금도 길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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