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사랑하는 아내, 슬픈 잔느 에뷔테른

by 최용훈

35세에 결핵성 수막염으로 세상을 뜬 이태리의 천재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사진을 보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 생각난다. 100여 년의 세월을 두고 태어난 두 천재 예술가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따르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30대의 중반을 넘기지 못한 짧은 생애,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에 대한 천재적 영감과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와 바이런

모딜리아니는 이태리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1884년 7월 21일 유대계 부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광산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결국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모딜리아니는 병약한 아이였다. 13세 때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의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그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인 리보르노의 미술학교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시작한 그는 18세가 되던 해 피렌체 미술학교에 들어가 조각을 배우게 되었으나 이듬해 베네치아로 옮겨 그림 공부를 계속하면서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적 경향을 접하게 된다.


33세가 되던 1917년 모딜리아니는 19세의 미술학도 잔느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1898~1920)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잔느의 부모는 가난한 화가였던 모딜리아니와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생애 첫 개인전을 갖게 되었으나 전시한 그의 누드화들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압수되고 전시회는 중단되었다. 실의에 빠진 모딜리아니는 술과 마약에 의지하게 되고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1918년 프랑스 니스로 옮겨간 그는 사랑스러운 딸을 얻고,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젊은 작가전’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한다. 1919년 아내가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되자 두 사람은 딸과 함께 파리로 돌아와 정식으로 결혼하지만 가난과 질병은 끈질기게 모딜리아니를 괴롭혔다. 결국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임신한 아내와 딸을 친정으로 보내고 만다. 혼자 남게 된 그는 결핵성 수막염으로 인해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1920년 1월의 추위 속에서 숨을 거둔다. 남편의 장례를 마친 잔느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임신한 몸으로 친정집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 : 잔느 에뷔테른(1919)

잔느는 20세의 나이로 자살 직전 죽음의 예감을 수채화로 그린다. 그녀의 그림은 죽음을 그리고 있었지만 차갑지 않았다. 가늘고 붉은 핏자국 외에는 전체적으로는 평화롭고 안락한 분위기가 그림을 채우고 있다. 사랑하는 남자와 꾸리고 싶었던 가정의 모습이 그녀의 침상, 그림 끝에 나오는 작은 탁자와 촛대에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하지만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불편하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인가.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먼저 떠난 남편을 떠올렸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함께 사랑했던 순간, 지중해 해변을 거닐며 바라보았던 그의 옆얼굴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잔느의 그림은 남편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닮아있다. 따뜻한 색채. 다만 죽음의 순간은 다소 혼란스러웠을 뿐이다. 사랑하던 그날과 죽음을 맞이했던 그날의 빛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이런의 시, '그녀가 걷는 아름다움은'(She Walks in Beauty)의 한 구절에 표현된 여인은 아내의 초상 속에 그리려 했던 모딜리아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소, 연한 얼굴빛은
착하게 살아온 나날을 말하여 주느니
모든 것과 화목하는 마음씨
순수한 사랑을 가진 심장"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 모딜리아니(1919)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그렸다. 대담하고 노골적이기도 했던 그의 누드화들은 사실적 표현과 모더니즘의 파격을 함께 담아내고 있었다. 당대에는 여성의 음모를 표현했던 것과 관련해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의 누드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도전적인 눈빛과 포즈로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는 당당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시를 사랑한 화가였다. 그는 단테를 포함해 많은 시인들의 시들을 암송했고, 특히 프랑스의 시인 로트레아몽 백작(Comte de Lautréamont, 1846~1870)의 산문시집 ‘말도로르의 노래’(1869년)를 좋아해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인간과 신과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저주 그리고 환상과 절망적 광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과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로트레아몽 백작은 병마에 시달린 천재 시인이었고, 그의 모습은 모딜리아니 자신의 병약함과 예측 불가한 기질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그를 통해 유태계 이태리인으로 파리의 이방인이 되어있던 자신의 외로운 삶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모딜리아니는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삶 속에 살아있는 것을 그리기를 원했다. 간혹 사진을 놓고 그림에 참고하기도 했지만 그는 실제의 모델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데생에 집착했고, 카페에서든 거리에서든 틈만 있으면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스케치를 하곤 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의 밑그림이 되었고 가끔 곤궁한 그의 수입원이 되기도 하였다.


20대의 몇 년 간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멈추고 조각에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다. 1912년에는 파리의 대규모 미술전시회인 ‘가을 살롱’(Salon d'Automne)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전기 작가들 중에는 이 시기 가난했던 모딜리아니가 어떻게 조각에 필요한 고가의 재료를 얻을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그 당시의 조각가들은 재개발이 한창이던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건축을 위해 쌓아 둔 석회암을 훔쳐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모딜리아니의 ‘머리’(Heads) 시리즈 작품들도 석회암으로 조각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머리' 시리즈

1918년 모딜리아니는 아내 잔느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의 대가였던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르누아르는 농담으로 누드화를 그리고 나면 모델의 엉덩이를 가볍게 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저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모딜리아니는 정색을 한채 “난 엉덩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누구의 비위도 맞추지 못했던 그의 곧은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함께 작업했던 여성 모델에 대한 존중의 마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잔느를 포함해 수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들의 표정과 포즈를 통해 작가와 대상 사이의 공감과 유대를 표현해내고자 했을 것이다.


2019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작품 '누워있는 나부'(1917)가 우리 돈으로 1,972억 원에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붉은색 소파에 놓인 푸른 쿠션 위에 누운 나체의 여인은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남편의 성공을 믿고 있던 잔느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린다. 그렇게 모딜리아니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었다. 그림값으로 위대한 천재 화가의 작품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살았던 과거의 아픔이 너무 커서 그렇게라도 그의 삶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다.


아내와 행복한 한 때를 보냈고, 딸을 얻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던 1918년, 그는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질병과 가난 그리고 화가로서의 좌절을 함께 겪고 있었지만 그 시간들은 행복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그 시절 그가 그려낸 남 프랑스의 풍경처럼 짙푸른 초록의 열망, 고즈넉한 마을의 평화 그리고 나무로 만든 다리 위를 걷는 여유가 잠시라도 그의 마음에 남아있었으리라 믿는다.

남 프랑스 풍경 : 모딜리아니(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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