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클로델, 프랑스의 여성 조각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머니는 이유 없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여동생과 남동생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던 어머니는 왜 카미유에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일까? 어린 카미유는 자의식이 강한 아이였다. 소아마비로 조금 다리를 절었던 여자 아이는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자신만의 세계로 숨어드는 것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세계에서 함께 지낼 친구들을 조각하는 일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되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것은 아버지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주머니칼을 넣고 다니며 흙과 나무를 깎던 어린 딸의 조각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알아봐 준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미술 교육을 위해 열세 살의 카미유를 안면이 있던 조각가 알프레 부셰에게 보낸다. 그 역시 카미유의 재능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녀를 국립 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절 여자 아이가 그 유서 깊은 명문학교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했다. 부셰는 공모전에 입상해 이태리 로마로 옮겨가게 되자 그녀를 당대의 유명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에게 보낸다. 그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녀와 로댕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9세의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은 1864년 12월 프랑스 북부 페레앙타르드누아(Fère-en-Tardenois)에서 태어난다. 그녀의 부모는 생후 두 주 만에 죽은 첫아들을 기리기 위해 첫 딸이 태어나자 카미유라는 양성적인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여동생 루이즈와 남동생 폴이 있었는데 폴은 이후 중국 주재 외교관이 되었고, 그런 이유로 나머지 가족들도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혼자 몸이었고 곤궁했던 누이를 돌보는 보호자였던 폴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녀가 요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카미유는 로댕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여동생 루이즈를 모델로 ‘열여섯 살 내 동생’을, 이후 ‘37세의 폴 클로델’ ‘42세의 폴 클로델 흉상’을 제작하였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은 외로웠다. 고집이 세고 강인했던 그녀의 성품이 그녀를 더욱 고립에 빠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각에 대한 자신의 정열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로댕의 작업실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작업에 매달린다. 당시 로댕은 오랜 세월 사실상의 부부였고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여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43세의 로댕은 예술적 열정에 사로잡힌 아름다운 젊은 여성 카미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조각가로서의 카미유의 인생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드리우게 된다.
로댕은 카미유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의 조각가로서의 경력에도 도움을 주기를 바랐다. 로댕은 늘 카미유와 함께 작업을 했고, 여러 모임에도 기꺼이 카미유를 동반하여 그녀의 재능을 찬양했다. 실제로 카미유는 로댕의 제자로서 그의 작품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키스’ 등의 제작에 함께 했다. 로댕은 그녀와의 자유로운 사랑을 위해 둘만의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카미유는 '뇌부르그의 광란', '이교도의 농지', '사쿤탈라'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고 조각가로서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사쿤탈라 : 카미유 클로델(1888)
카미유의 명성이 커짐에 따라 그녀의 작품들은 보다 독창적이고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로댕과의 관계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1888년 카미유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미술 공모전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조작가로서 승승장구한다. 로댕과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그녀는 마침내 1892년 로댕의 작업실을 나온다. 로댕과의 결별은 조각가로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그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것은 그 시대 여성 예술가들이 겪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카미유의 동시대 여성 작가였던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이라는 글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신만의 방과 돈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돈과 방은 여성으로서 예술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술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시절, 여성의 한계는 너무도 분명했다. 하긴 오늘의 시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긴 하지만. 버지니아는 남성들의 편견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에 항거했지만 결국 모더니즘 소설의 선구자라는 명예는 남성인 제임스 조이스에게 돌아간다. 카미유의 작품들이 페미니즘이 굳건히 자리 잡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여성 예술가에 대한 편견의 시각이 어느 정도나마 변화하게 되는 데는 그렇듯 오랜 세월이 걸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세기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자의식이 강했던 버지니아와 카미유는 결국 정신적인 안정감을 상실한다. 두 여인 모두 조현병에 시달렸고, 버지니아는 자살로, 카미유는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이다.
로댕과 헤어진 후 1892년 살롱에 작품 ‘성숙’을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이후 그때까지 연락을 유지하던 로댕의 권유로 벨기에 예술가 협회 주최로 열린 전시회에 ‘로댕의 흉상’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댕의 그림자는 너무도 컸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로댕의 애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생계를 꾸려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로댕과 헤어진 후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와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카미유는 남성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조각으로 이어진 로댕과의 유대를 끊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899년 살롱에 출품한 대리석 조각이 도난당하자 카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훔쳐갔다고 주장하여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성숙 : 카미유 카르델(1892)
카미유는 로댕에 대한 의존만큼이나 그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취약한 정신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1900년의 ‘애원하는 여인’이란 제목의 조각은 어쩌면 로댕에게 잊힌 자신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후 그녀의 삶은 곤궁함과 외로움으로 피폐해져 간다. 알코올에 의존하고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파괴된다. 매일 밤 로댕의 집에 돌을 던지고 심지어 그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하였다. 결국 그해 3월 남동생 폴은 카미유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30여 년을 이곳 저것 정신병원을 떠돌며 비참하게 늙어간다. 79세의 카미유는 1943년 10월 몽드베르그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한 많은 삶을 끝낸다.
애원하는 여인 : 카미유 클로델(1900)
죽어가던 그 긴 세월 동안 카미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각 예술을 미술사의 중심으로 되돌리고 조각의 역사를 새로 쓴 오귀스트 로댕. 그녀는 로댕의 그림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마을의 바위를 본떠 자신의 조각을 만들 때처럼,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여인으로서 그녀는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그 시절 로댕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작업했던 조각 ‘키스’의 느낌을 기억하며 미소 지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