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우리를 지겹게 한다.” 폴 고갱(Paul Gaugin)에게 평범한 삶은 고통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화가였고, 미술의 혁신가였고, 순수하고 원초적인 것을 찾아 헤맨 탐험가였다.
고갱은 언론인인 아버지 그리고 사회주의 지도자였고 초기 페미니즘 운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1848년에 태어났다. 고갱의 가족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 무기력한 프랑스의 정치적 풍토에서 벗어나 남아메리카 페루의 리마로 이주한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그 긴 항해에서 그의 부친은 병을 얻어 사망하고 이후 4년 간 어린 고갱과 여동생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리마에 있는 먼 친척과 함께 살았다.
1855년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자 고갱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중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 오를레앙에 정착한다. 그곳에는 고갱의 친할아버지가 살고 있었고, 비로소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7세가 되던 해, 고갱은 의무 복무로 상선의 일원이 되었고, 3년 뒤 프랑스 해군에 입대한다. 고갱의 오랜 방랑의 삶은 이렇듯 바다에서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남미 카리브해에서의 원시적 삶과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1867년 어머니가 세상을 뜬 이래로 고갱은 그의 후견인이자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 구스타프 아로자와 함께 생활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Eugene Delacrpix),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숲 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살면서 농민의 생활과 풍경을 주로 그리던 바르비종파들의 그림과 친숙하게 된다. 당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심미안을 키우게 된 것은 이후 고갱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872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주식 중개인이 되고, 이듬해 네덜란드 출신의 메트-소피 가드(Mette-Sophie Gad)와 결혼한다. 이후 고갱과 그의 아내는 자녀들을 데리고 파리에서 코펜하겐으로 이주한다. 고갱은 주식 중개인 일을 계속하면서 미술품의 수집 및 거래에도 손을 대게 되는데, 이때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모네(Claude Monet). 피사로(Camille Pissaro) 등의 그림을 취급하게 된다. 그리고 1880년 무렵에는 여가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을 익히게 된다. 정규의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고갱은 이 시절 자주 화랑을 출입하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임대해 그림을 그렸다. 더욱이 새 친구들인 피사로나 폴 세잔(Paul Cézanne)등의 화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였고, 1881년과 1882년에는 파리에서 공식적인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1882년 주식중개업을 그만둔 고갱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가족을 네덜란드에 남기고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1886년 중반 몇 달을 브르타뉴의 퐁타방 지역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는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곳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의 화풍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색채와 구도, 주제의 융합을 추구했다. 인물이나 자연을 인상파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도 대상의 외면과 함께 그 내면의 삶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이점에서 고갱은 인상파 화가들과 구분된다. 1886년에 발표한 ‘브레통의 네 소녀’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인물들의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네 소녀는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로 제 나름대로의 삶의 고뇌를 표출한다. 그녀들의 표정은 세속의 삶을 초월한듯한 무심함을 보여준다.
브레통의 네 소녀(1886)
이후 고갱은 파나마와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등을 여행하였다. 그곳에 오두막을 짓고 동료 화가인 샤를 나발과 함께 생활하면서, 원시 문명에 대한 동경, 원시부족에 대한 관찰, 풍부하고 생생한 색채의 발견 등 고갱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갱이 고흐를 만난 것은 188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둘 다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인상파의 화풍을 쫓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자화상을 포함해 자신들의 작품을 교환하였다. 1888년 고흐의 초청으로 고갱은 프랑스 남부 아를에 있던 그의 ‘노란 집’에서 9주 간 함께 기거하기도 하였다. 고흐의 동생 테오는 미술품 수집상으로 고갱의 그림을 거래했던 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아를에서 함께 한 9주 동안 두 화가는 인상적인 작품들을 여러 편 그려낸다. 고갱의 ‘아를의 밤 카페’와 ‘설교 후의 환상’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작품들이다. 당시만 해도 두 사람 모두 화가로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들은 주류 인상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찾고 있던 실험적 예술가들이었다. 하지만 예술적 측면의 강렬한 유대는 고흐의 우울증 증세와 과격한 감정의 분출로 두 달 남짓 만에 끝나고 만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고흐는 얼마 뒤 자살(혹은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두 천재 작가들은 서로를 깊이 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교 후의 환상 (1888)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인상파나 후기 인상파의 양식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황색의 그리스도’(1889)에서 보듯 상징주의 미술에 더욱 경도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판화, 아프리카의 민속예술, 남미와 카리브해 여행 등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91년 이미 여러 해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던 고갱은 사실상 가족과 영원히 헤어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이주한다. 그리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는 인위적인 유럽의 문화에서 벗어나 보다 자연적인 원시생활을 동경하였다. 고갱은 생의 마지막 10년을 타이티, 푸나아우비아, 마르케사스 제도 등에서 생활한다. 이 시기 그는 ‘해변의 타이티 여인들’(1891), ‘달과 지구’(1893), 타이티의 두 여인‘(1899) 등 보다 전통적인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또한 다소는 종교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실험도 계속했는데 1897년에 발표한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무렵 그는 화가로서의 경력에 작별을 고하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휴식과 관조의 삶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한 강박에 빠져있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심지어는 이전에 그렸던 그림 속의 인물들을 소환해 마치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1899년 한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일요일과 휴일에만 그림을 그리고 있소.” 그것은 진지하게 화가의 길에 접어들기 전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비하적인 빈정거림 얼마 후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1903년 5월 정신적으로 억눌리고, 약물 중독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던 고갱은 매독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54세를 일기로 마르케사스 섬에서 숨을 거두고 그곳에 묻힌다.
아이티의 두 여인(1899)
고갱의 자연주의적 형식과 “원시적인” 주제들에 자극 받은 젊은 화가들은 후기 인상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 보다 추상적이고 시적인 주제에 시선을 돌리는데 이들은 상징주의 시나 신화, 고대의 역사, 비서구적인 문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인간 경험의 정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측면을 그려내게 된다. 궁극적으로 고갱은 20세기 현대 미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피카소(Pablo Picasso)와 브라크(Georges Braque)가 1911년에서 1915년 사이에 전개한 입체파(Cubism)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고갱이 사용한 대담한 색채는 드랭(Andre Derain), 마티스 (Henri Matisse) 등 강렬하고, 선명하며 때론 “비현실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파(Fauvism) 화가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갱은 그의 미술 작품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도 전설이 되었다. 그의 ‘이국적인’ 삶과 그 이야기들은 많은 문학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는데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의 ‘달과 육 펜스’(The Moon and Sixpence)는 원시적 자연 속에 살았던 이 위대한 화가의 삶을 기초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고갱이 걸어간 평생의 여정은 자신만의 미술, 자신만의 색채와 삶의 주제를 찾아서 떠난 모험의 길이었다. 그는 예술과 삶을 하나로 결합하려는 깊은 사유의 시간과 이국적인 세계의 신비함 속에서 꿈과 신화 속을 거닐었던 외로운 방랑자였다. 화가 고갱의 삶은 그 자체로 짙은 물감으로 채색된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