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죄의식 그리고 비창

고독, 동성애, 죄의식

by 최용훈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삶은 찬란했다. 미국, 유럽으로의 수많은 연주 여행과 찬사, 케임브리지 대학 명예 음악박사학위 수여 등 그는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1891년 카네기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브람스(Brahms), 생상(Saint-Saëns)과 더불어 살아있는 세 명의 위대한 음악가로 묘사되었다. 그는 많은 음악평론가들의 표현처럼 “현대음악의 제왕‘이었다.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나라 러시아는 문학뿐 아니라 음악, 무용, 연극 등 위대한 예술의 전통을 이어왔고, 그 가운데 차이콥스키라는 불멸의 작곡가를 탄생시켰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모든 계층의 국민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러시아의 황실로부터도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알렉산더 3세는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천재성을 인정해 개인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상당한 금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에게는 늘 동성애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그의 동성애 성향은 러시아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로 인해 개인적인 삶의 안정성은 훼손되고, 정신적인 고통과 함께 음악적 영역에서도 편견에 시달렸다.


성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 지극히 도덕성이 강조되었던 19세기 유럽, 차이콥스키의 동성애에 관한 소문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확산되었고, 그로 인해 서구의 음악계는 그의 음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감상적이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심지어 병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하고 난 뒤이기는 하지만 1895년 영국과 서유럽을 휩쓴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동성애 재판의 여파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한 때 더욱 강화되었다. 19세기 후반 동성애는 비도덕적이고 병적인 행태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 도덕적 편견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전기 작가들이나 음악평론가들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그의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19세기의 대부분 차이콥스키라는 이름은 그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낭만적 슬픔과 어두운 에로티시즘의 대명사로 여겨졌고, 끊임없이 청중들의 혐오스러운 상상력 뒤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러한 편견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고전 발레의 무대를 감싸는 그의 선율은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도약을 더욱 빛나고 신비롭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곳 광산의 감독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계 러시아인이었다. 차이콥스키는 다섯 살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공무원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차이콥스키는 열 살 때 생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실 법률학교에 입학한다. 1854년 어머니가 콜레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린 차이콥스키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한 정신적 방황을 평생토록 거듭하게 된다. 그의 삶을 관찰해온 많은 전기 작가들은 사랑했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무능하고 무관심한 부친에 대한 적개심 등이 그의 성격 형성과 심지어 그의 동성애적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열아홉이 되었을 때 그는 러시아 제국 법무부의 서기로 임명되어 몇 년간 근무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점점 커져 갔다. 결국 그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1862년 새로 창립된 생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작곡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1866년 그의 스승인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안으로 모스크바로 이주해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가 된다.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작품이 첫 연주된 것은 1865년의 일이었다. 3년 뒤인 1868년, 그의 교향곡이 호평을 받게 되고 1874년에는 ‘피아노 콘체르토 1번’으로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리고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사임한 1878년 이후 작곡에만 몰두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내놓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특히 ‘백조의 호수’(1877) ‘잠자는 숲 속의 미녀’(1890) ‘호두까기 인형’(1892)과 같은 발레곡으로 명성을 얻는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와 관련해 계속되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 자신에게 끝없이 구애를 보낸 제자 안토니아 밀류코바와 1877년 결혼한다. 하지만 그 결혼은 재앙이었다. 안토니아의 성품과 성적 취향은 차이콥스키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결혼식을 올린 지 몇 주도 안 되어 차이콥스키는 아내와 결별한다. 갑작스러운 정신분열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도망치듯 해외로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1878년, 차이콥스키가 음악원 교수를 사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다 폰 메크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녀는 1890년까지 매달 일정액의 생활비를 제공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후원 계약 조건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든 간에 차이콥스키는 그녀의 후원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작곡에 몰두하는 것으로 상쇄코자 했다. 음악원을 나온 후 그는 ‘교향곡 4번 F단조 작품 36’(1877), 푸시킨의 시에 곡을 붙인 오페라 ’ 예브게니 오네긴‘(1878), ‘피아노 소타나 G장조 작품 37’(1878), ‘관현악 모음곡 1번 D단조 작품 43’(1878~79),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을 위한 음악,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두고 쓴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1878~79) 등을 발표한다. 또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1878)와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작품 48(1880), ‘이탈리아 기상곡 작품 45’(1880), ‘1812년 서곡 작품 49’(1880) 등 차이콥스키의 걸작들이 잇달아 만들어진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늘 불안과 열등의식과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나친 흡연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조울증 증세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의 동성애적 기질과 죄의식이었다. 그는 19세기의 유럽에서는 성적인 측면의 이단자였고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문학으로도 도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차이콥스키는 음악으로도 자신을 옥죄는 동성애의 굴레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끝없는 외로움의 나락으로 떨어뜨렸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던 누이의 집에서 보냈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시간들도 조카인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죄의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미칠듯한 고독 속에서 폭음과 창작만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1888년 그는 유럽 순회 연주를 떠난다. 라이프치히, 함부르크, 베를린, 프라하, 파리, 런던을 돌며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였다. 그것은 그의 음악적 여정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음악은 유럽의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푸시킨을 각색한 두 번째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1890)도 갈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경쇠약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차이콥스키의 내부에 들끓었던 죄의식과 환멸 그리고 소외의 감정들 속에서 그는 마지막 교향곡 6번 ‘비창’(1893)을 발표한다. 그리고 작품을 직접 초연한 지 9일 후 그는 세상을 등진다. 죽음의 원인은 그의 어머니를 빼앗아갔던 콜레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 귀족의 조카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송사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9세기 후반을 살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위대한 음악가의 죽음은 그렇게 가십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그렇듯 하찮은 존재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을 감싸고 감동의 순간을 선사한다. 그래서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하는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갱, 원시에의 동경과 탐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