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셸 바스키아, 검은 피카소

나는 예술이 아닌 삶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by 최용훈

1970년대 후반 맨해튼의 거리에 암호와 같은 메시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두 ‘SAMO’라는 사인이 들어있었다. 전복적이고 다소는 위협적이기도 했던 이러한 표현들은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 낙서 같은 그림들은 미술계에 조차 악명을 알리게 된다. 결국 SAMO의 작품들은 장 미셀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와 그의 파트너 알 디아즈(Al Diaz)의 시적 파손 행위였던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장 바스키아-1 (2).png 무제(두개골), 1981

바스키아의 많은 작품은 자전적이다. 1981년에 그린 ‘두개골’(Skull)은 대체로 자화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림 속의 두개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은 초점이 없고, 뺨은 움푹 파였으며, 전두엽 부분은 잘려나갔다. 하지만 내면의 들끓는 감정은 강렬한 색채 속에 절망과 의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좌절한 흑인성(blackness)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아프리카적인 가면과 그 가면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스키아는 대부분 며칠 내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작품에 있어서는 수개월 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두개골'은 뉴욕시에서 열렸던 그의 첫 개인전에 전시되었는데 그 강렬한 표현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압박감의 발로이기도하였다.

장 바스키아-2 (2).png 무제, 1982

'검은 피카소'라 불린 바스키아의 1982년도 작품 ‘무제’(Untitled)는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050만 달러, 한화로 무려 1246억 9925만 원에 낙찰되며 미국 미술계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미술품 경매 사상 6번째로 높은 가격이기도 했다. '1200억짜리 낙서'로 알려진 이 작품은 푸른색 바탕에 그의 정체성인 흑인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이 다양한 원색들과 섞여 그의 이중적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한 내면의 적개심과 함께 뉴욕의 미술계에서 인정받고자 했던 욕망에 대한 표현이기도 했고, 그러한 위선의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난다. 아이티와 푸에르토리코 이주민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회계사였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림에 관심이 있던 그는 뉴욕의 미술관들을 찾으며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워갔다. 특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이 모더니즘적 실험성과 피카소의 큐비즘에 영향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자 10대의 바스키아는 집을 나온다. 맨해튼 남부지역에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밴드 활동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1980년 무렵 언더그라운드 펑크와 그라피티(graffiti) 예술가들이 버려진 마사지 건물에서 열었던 ‘타임스 스퀘어 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바스키아는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지만 학창 시절의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SAMO(Same Old Shit!, 그게 그거지!)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뒷골목 미술’을 시작하였다. 스프레이와 마커, 오일 크레용으로 뉴욕 소호 거리의 외벽에 ‘낙서’를 그려대고 SAMO라는 서명을 써넣는다. 그들은 그렇게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의 개척자가 되었다.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붓질을 한 SAMO의 작품이 언론의 호평을 받으면서 바스키아는 자신의 그림을 팔게 되고, 그가 살던 낡은 셋집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 바스키아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술적 성공이 풍요로움을 보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젊었던 그에게 예술적 성공에 대한 강력한 욕망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재즈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의 삶에 대한 고달픔을 노래했던 흑인 영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 대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흑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민속적 음악과 백인 음악을 혼합해 등장했던 재즈는 그 흐느적거리는 선율과 흑인들의 스웩과 신코페이션을 가미하여 우리의 영혼을 흔든다. 바스키아는 재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주자였던 두 사람의 재즈 연주자를 자신의 캔버스 위에 묘사하고 있다.

장바스키아-3 (2).png 호른연주자, 1983

1983년도에 나온 ‘호른 연주자’(Horn Players)에는 재즈의 전설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가 등장한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 알토 색소폰을 든 파커가 위치하고 오른편에는 트럼펫을 든 길레스피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사랑했던 두 명의 연주자들과 재즈에 대한 헌정이었다. 세 개의 패널로 구분된 이 작품은 흰색의 물감을 역동성 있게 흘려놓음으로써 마치 캔버스 위로 음악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리듬이 시작되고, 사라졌다가 다시 반복되는 재즈의 즉흥성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뉴욕의 거리를 휩쓸며 낙서를 예술로 만들어 가던 두 젊은이는 예술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예술가로서 세속적 성공을 꿈꾸었던 바스키아와 다르게 알 디아즈는 거리의 미술가로 남길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되고 이후 거리의 낙서에는 SAMO의 종말을 알리는 ‘SAMO is Dead’라는 문구가 선언처럼 적히게 된다. 이 결별 이후 바스키아가 뉴욕의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유명한 미술평론가 르네 리카드(Rene Ricard)의 권유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바스키아가 당시의 뛰어난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팝 아트(Pop Art)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재능을 인정한 워홀은 물심양면으로 그의 미술가로서의 성공을 돕는다. 그의 천재적 독창성은 대가의 후원 아래 빛을 발하며 바스키아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뉴욕의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된다. 바스키아에게 있어 워홀은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천재의 독창적 작품에 매료된 언론과 미술품 거래상들은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에 깊숙이 개입한다. 언론들은 그와 앤디 워홀의 관계를 가십 같은 연인관계로 다루었고, 거래상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작품의 생산을 강요했다. 짧은 시간의 작품 활동에서도 그가 3,0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긴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결국 예술의 상업주의가 강력히 침투하게 됨에 따라 바스키아의 예술적 열정과 순수성은 고뇌와 좌절로 이어졌고 그는 절망감에 대한 도피처로 마약에 의존한다. 더욱이 1987년 앤디 워홀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는 암연 같은 고독 속에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일년 뒤 바스키아도 헤로인 중독으로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의미에서 바스키아는 예술과 자본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그의 그림은 뉴욕의 미술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통찰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그림은 예술과 상업주의의 양 극단을 오가며 그 가치를 발했으나 그의 삶은 끝없는 갈등과 좌절 속에 침잠했다. 그의 검은 얼굴들은 인종적 차원을 넘어 그의 내면에서 떠나지 않던 자신의 예술에 대한 회의를 나태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낙서’ 속에 그려진 많은 이미지들은 예술이 아닌 삶에 대한 외침이었고,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탐색이었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예술은 곧 그의 삶이었다. 그것은 뉴욕의 거리를 지나며 보게 되는 현대의 초상이었다.


"나는 작업하는 동안 예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I don’t think about art while I work, I think abou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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