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구상을 그리다.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베르나르 뷔페는 화가였으며 석판 인쇄나 에칭 작업을 한 판화가였다. 파리 미술학교 출신인 그는 이른 나이부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이후 다작 작가로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약 8,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독창적인 스타일로 자신만의 미술을 추구했다. 추상화가 압도적이던 당시의 미술계에서 뷔페는 재현 미술(구상)을 옹호했고, 반 추상 그룹인 ‘목격자’(L’homme Témoin)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베르나르 뷔페는 동시대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와 작가 알베르트 카뮈(Albert Camus)의 부조리 사상에 공감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나치 점령 중 프랑스에 퍼져있던 ‘불안’의 감정을 표현하였고, 전후 구상 미술계를 지배하였다. 뷔페는 사회비평의 정신을 사실주의적 스타일로 그려내면서도 물감의 선택을 억제하고 검은색의 선들을 사용하여 독특한 분위를 창조하였다. 그는 ‘전쟁의 공포’ 시리즈와 수많은 거리 풍경, 각지고 감정 없는 표정의 인물화들로 유명했다. 자화상, 정물화 그리고 역사적, 종교적 주제의 그림도 다수 그의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으며 회화 외에도 석판 인쇄와 에칭 기법을 이용한 판화, 그리고 조각들로 다양한 주제를 표현하였다. 뷔페는 생애 전반에 걸쳐 큰 예술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말년에 심각한 파킨슨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1999년 7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의 그림들은 뾰족하고 길게 늘어진 모습들을 어두운 색채들로 표현한다. 이러한 화풍이 그의 작품에 엄중하면서도 외로운 분위기를 더해주어 전후 세대의 감정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뷔페는 수십 차례의 해외 초청 전시회를 가졌으며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지성과 감성의 문인 프랑수아 사강 등과 함께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젊은 재능 5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대중들에 의해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권위 있는 레지옹 도뇌르 문화훈장을 두 번이나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들은 런던의 테이트 현대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일본에는 베르나르 뷔페 미술관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온 베르나르 뷔페는 모더니즘의 실험적 격랑 속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기존의 사실주의적 구상화를 거부하고 원근법조차 무시한 추상화의 실험성을 강조하였다. 피카소(Pablo Piccaso)의 입체파(Cubism), 달리(Salvador Dali)의 다다이즘(Dadaism),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의 미래파(Futurism) 등 기존의 미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추상주의가 20세기 전반 전위 예술(Avant Garde)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피카소, 뭉크,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의 저명한 화가들 사이에서 베르네르 뷔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구상과 재현’의 미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은 구상적인 묘사를 통해 역사, 죽음, 성, 대중문화, 정치 등 수많은 구체적 현상들을 표출하고 있으며 20세기의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서 그려내고 있다. 뷔페가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은 외롭고 슬프다. 그들은 서커스의 광대이며 암울한 도시의 이방인들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광대일 것 같아요”
서커스의 광대라는 표현은 베르나르의 내면을 설명하는 은유이다. 어릿광대와 피에로는 빨간 코와 우스꽝스러운 분칠을 하고 웃고 있지만, 그들은 슬프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잃고 있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베르나르는 자신이 캔버스로, 판화로 만들어내었던 세상 속의 사람들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것은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마르고 뾰족한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체온을 나누고 싶은 그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위로하는 세상을 꿈꾼다. 그림 속 광대의 슬픈 눈빛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동정심을 찾아내게 된다.
베르나르는 10대에 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그리고 나치의 파리 점령 때의 공포를 경험한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해 벌어진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목도했다. 전쟁의 잔인성 앞에서 인간은 본질을 상실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제기하며 인간은 깊은 밤, 바다에 ‘던져진 존재’(thrown-out being)이며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태어난 무의 존재(nothingness)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그렇게 부조리의 세계가 예술 속에 펼쳐진다. 베르나르의 작품들 속에 표현된 그 적막한 세상은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부여받은 본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인간에게 가해진 그 참혹성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도 회의와 불안에 빠지게 할 뿐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한 화가로서 베르나르는 전쟁을 이렇게 회고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과 그릴 것만 찾아다녀야 했다.” 그 삭막하고 황폐한 전후의 세상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절망과 좌절, 환멸과 증오의 감정을 일으켰다. 영국의 희곡작가 존 오스본(John Osborne)의 표현처럼 전후의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은 메마른 삶의 거리를 헤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그릴 것을 찾아 헤맨 미술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린 풍경은 왜 그리 외로울까.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검은 색채의 무거움과 암울함. 그가 살았던 20세기는 그에게 있어 차갑고 어두운 세상이었다. 물질이 인간성을 억누르고, 인종 차별이 수백만에 대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고, 전쟁으로 수천만의 생명이 벌레처럼 죽어갔다. 그곳은 불안의 구름이 드리워진 죽음의 골짜기였다.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경제적 풍요는 그의 내면을 감싸고 있던 그 질긴 공포의 감정에 압도되었다. 그의 죽음은 그러한 인간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없게 된다는 절망감은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전쟁의 공포와 닮아있었다.
베르나르는 시대의 추상성에 반기를 들고 상황과 사물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외부적 인상이 내면에 와서 찍힌 대로 그려냈듯이 그는 다분히 표현주의적이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을 예술가의 내부에서 왜곡하고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사실주의를 초월해 자신의 내면에 들끓는 무수한 감성들과 실제의 대상을 혼재하여 구체적이지만 신비롭고, 사실적이지만 초월적인 세계를 그려내었다. 그의 그림은 20세기의 감성을 포착해 그것에 형태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술적 취향과 관계없이 다수의 대중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