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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27. 2020

증오, 가치의 멸종으로 이끄는 감정

희생양을 찾는 증오 범죄자

증오에 따르는 폭력    


증오범죄(hate crime)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그리고 노인, 장애인 등 힘없는 소수자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감에서 행해지는 범죄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종차별주의(racism)의 현대적 재현이다. 그리고 그 증오의 감정은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해치는 병적 심리로 발전한다. 동성애자나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들은 현대적 병리현상의 한 단면이다. 18세기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가한 수많은 폭력행위도 증오범죄의 전형일뿐 아니라, 미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있는 린치(lynch, 私刑)의 기원이다. 린치는 법적인 절차 없이 타인에 대해 사적인 형벌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남북전쟁 이후 19세기 말, 미국에서 흑인들에게 가해진 린치는 증오심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백인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만으로 흑인들은 구타당하고, 목 매달리고 불에 타 죽어야 했다. 심지어 백인들은 처형당한 흑인들의 신체 일부를 기념품으로 나누어 가졌고, 린치의 현장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기도 했다. 집단적 정신분열증에 다름 아니다. 당시의 신문에는 린치가 가해질 장소와 날짜가 실려 있었다. 살인의 현장을 마치 서커스와 같은 구경거리로 삼고 있었다니 증오심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잔인성과 폭력성의 극단을 보는 것 같다.

나와 다른 사람들

  

증오범죄의 특징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을 특정화하는 경향이다.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나치 독일은 유태인 집단을 증오의 대상으로 특정화함으로써, 모든 유태인들의 멸종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증오범죄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증오심을 이용한 수많은 테러가 자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망자와 실종자가 거의 40만 명에 달했다. 당시의 일본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민심은 안정되지 않고 혼란은 가중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흘렸다. 국민들의 증오심에 호소했던 것이다. 성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찾아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고 수 천 명의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인간의 증오심을 이용한 국가의 범죄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다. 증오로 인한 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불만, 피해의식 그리고 극심한 고립감에 따른 자기혐오가 증오의 모습으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오늘날 우리는 증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는 증오 범죄자와 더불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분노, 증오 그리고 복수     

  

증오는 분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분노는 분출되는 순간 약화되지만 증오는 지속적이다. 그래서 그 대상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 신화에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의 숲을 파괴한 에뤼시크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만에 빠져 여신의 숲, 요정의 나무를 도끼로 찍어낸다. 데메테르의 분노는 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데메테르는 요정 오레이아스를 시켜 기아의 여신에게 잠들어 있는 에뤼시크톤의 뱃속에 영원한 굶주림을 안기도록 부탁한다. 잠에서 깬 그는 끝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먹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 딸을 팔아서 먹을 것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먹게 된다. 결국 자신의 육신을 다 먹어치우고 생명이 끊어져서야 그는 여신의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증오는 이렇듯 집요하게 상대를 파괴한다.  

  

분노의 감정이 증오로 바뀌면 그것은 복수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대표작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정치적 누명을 쓰고 14년 간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늙은 죄수 아베를 통해 몬테크리스토 섬에 숨겨진 막대한 보물에 대해 듣게 된다. 아베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담을 자루에 대신 들어가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을 찾아 복수를 감행한다. 증오가 만들어내는 복수의 드라마는 언제나 그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한다. 당테스 역시 복수를 통해 정의를 세우고자 했던 자신의 집념이 신의 섭리를 넘어서는 행위는 아니었는지 자책한다. 복수에 대한 또 다른 문학적 예는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마침내 그는 원수인 숙부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살해하여 복수를 완성한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 죄로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니에스에게 쫓기게 된다. 아테네에서 열린 재판에서 유죄와 무죄에 대한 평결이 동수를 이루자 재판장인 아테나 신이 최종적으로 그의 무죄를 선고한다. 복수의 고리를 끊고자 했던 고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증오에 따르는 복수는 언제나 또 다른 증오와 복수를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증오의 힘     

  

로마 시민 앞의 안토니우스

버트런드 러셀은 증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 차르 정권은 레닌의 형제들을 살해한다. 이것이 레닌에게 증오심을 품게 하였고 혁명을 성공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위 ‘증오의 힘’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역사 속에는 증오를 이용해 목적을 이룬 놀라운 사건들이 발견된다. 논리와 진리로 대중을 움직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와 공격성을 끌어내는 것이 변혁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는 혼란에 빠진 로마의 시민들을 향해 외친다. “내가 시저를 죽인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저의 야심을 설명하고 로마인들을 자유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호소한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주검을 꺼내어 그의 비참한 죽음을 보게 하고,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겠다는 시저의 유서를 공개함으로써 군중을 감격케 하고 격동시킨다. 그리고 시저를 살해한 자들에 대한 증오를 끌어낸다. 증오라는 마음의 흐름을 통해 공격적인 에너지를 생성하는 것, 그것이 증오의 힘이다. 그러나 증오의 힘은 언제나 파괴적이다. 히틀러의 힘은 증오에 있었을 것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도 증오의 힘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대 이탈리아 최고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역사소설 ‘프라하의 묘지’에는 유럽인들, 여성들, 종교집단 등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살인마 시모네 시모니니가 등장한다. 그는 극단적인 증오심에서 힘을 얻지만 그로써 모든 위선과 거짓과 악행을 정당화하는 문학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증오의 힘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 레비아탄처럼 “그 앞에서는 절망의 그림자만이 흐느적거릴 뿐이다.” 증오의 힘은 우리를 달리게 하지만 그 도착지는 언제나 파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증오는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인종적 분쟁, 종교 간의 갈등, 빈부의 격차, 그리고 소외 속에서 커져가는 정체성의 불안. 이로써 한 순간의 여유와 사색도 허락되지 않는 현대인의 삶에 증오의 씨앗만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이유 없이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익명의 대중에 대한 테러가 일어나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를 공격하는 공포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생 철학자 가세트(Ortega Y Gasset)는 증오를 가리켜 “가치의 멸종으로 이끄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증오의 감정 앞에서는 사랑도, 우정도, 가족의 유대도 존재할 수 없다. 증오에 빠진 순간 우리가 소중히 지켜왔던 모든 삶의 가치들이 무너져 내린다. 증오는 힘일 수 없다. 증오는 우리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할 파괴적인 감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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