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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28. 2020

타협, 0.1도의 미학

타협을 잊은 사회: 차선(the second best)의 선택

외교의 원칙은 위협(threat), 타협(compromise), 보상(remuneration)이라고 한다. 힘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필요하다면 위협을 가해서라도 목표를 성취한다. 만일 그것이 어려우면 상호 간의 양보(concession)를 통해 타협을 이룬다. 그리고 그 타협의 결과에는 양보에 따르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 사실 이 원칙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타협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인간사의 모든 부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타협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든 논쟁에서 여러분은 결국 어느 쪽도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그르지 않은 지점에 도달합니다. 진정으로 평화와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타협이 유일한 대안인 때가 올 것입니다.” 만델라의 말은 타협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 많은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 자체가 차선(the second best)의 선택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타협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태리 속담에 “말을 잃는 것보다는 안장을 잃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으면 작은 것을 양보하고라도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얻는 것, 그것이 타협의 매력이다. 과거 소련의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ov) 서기장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극락조를 잡을 수 없다면, 볼품없는 암 닭이라도 얻는 게 좋다.”          


역사와의 타협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 십만 명의 유태계 폴란드인들을 위한 위령탑 앞에 검은 외투를 입은 독일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나타났다. 초겨울의 흐리고 쌀쌀한 날씨에 바르샤바를 방문한 독일의 총리가 위령탑에 헌화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도진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란트 총리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행동을 보였다. 그가 위령탑 앞, 비에 젖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던 것이다. 세계는 경악과 함께 감동했다. 전쟁이 끝나고 25년이 지난 뒤, 서독의 총리가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빌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은 이렇게 썼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진심은 전달되었다. 독일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많이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역사와 타협한 정치가였다. 독일의 역사에 나치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의 현실 앞에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를 바쳤다. 독일인들은 인류사에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트 총리는 스스로 무릎을 꿇음으로써 그 죄에 대한 증오의 감정과 타협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고백과 참회 위에 이루어진 위대한 타협이었다. 세계인들은 나치의 죄는 용서하지 못했지만, 그의 절절한 속죄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진심이 담긴 그의 행동은 독일의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위대한 타협의 전형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     

  

‘타협의 효과’는 극단을 피해 안전한 중간을 택하는 사람의 심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극단은 언제나 위험하고 중간은 언제나 안전한 것일까? 양 극단의 가운데를 택하는 것이 과연 타협일까? 지구가 필요로 하는 산소의 4분의 1을 생산하여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의 열대우림 지역은 지속적인 남벌과 무분별한 개발로 황폐화되어 왔다. 매년 한국 면적의 5분의 4에 해당하는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아마존과 콩고강 주변의 열대우림이 말라가고 있다. 개발과 남벌이라는 자연 파괴의 행위를 인간이 이성적으로 멈출 수 있을까? 아니면 강제로라도 막아야 하는가? 적당한 타협점은 없을까? 온실가스 현상으로 기상이변이 계속되고 거대한 자연의 재해를 앞에 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연에 대한 훼손 행위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자연과의 타협”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전해야 하는 일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는 타협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숲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개발과 보존은 타협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는 타협에 능하다. 그래서 원칙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황과 타협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그릇된 믿음과 타협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불행한 결말을 도외시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원하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혀 오늘의 우리는 너무 쉽게 타협을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한다. 마음속에 자리한 두 가지 것에 대한 선택의 타협, 그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일지 모른다. 타협은 극단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만은 아니다. 동양의 중용이나 서양의 균형감각은 선을 위한 중도의 처세를 말하는 것이지 양 극단 사이를 좌고우면 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폭약을 만드는 미국의 듀폰(Dupont)사에서는 단 한 번의 폭발사고도 없었다. 그 이유는 이사회와 사장단의 사무실을 모두 화약고가 자리 잡은 건물 내에 두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극단을 선택함으로써 타협에 따르는 위험을 상쇄하고 있는 것이다.    


타협의 정신    

  

타협이 필요한 두 대상이 있을 때, 그들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동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협함으로써 잃을 것이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보다 적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타협을 통해 상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은밀한 행복감이다. 그래서 독일의 2대 총리를 지낸 에어하르트(Ludwig Erhard)는 “타협이란 각자가 더 큰 케이크 조각을 받았다고 믿도록 케이크를 나누어주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타협은 상대적인 만족감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상대가 더 많은 양보를 했다고 믿는 심리, 그것이 타협에 이르는 동기이다. 타협은 최선을 포기하고 차선을 택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상대방보다 더 얻었다는 만족감은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일 것이다. 협상에 있어서는 상대에게 얻는 것이 있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 주된 전략이다. 그러나 타협에 이르는 협상과 거래를 위한 협상은 다르다. 세계적인 협상 전문가로 알려진 허브 코헨(Herb Cohen)은 ‘협상의 법칙’(원제: You Can Negotiate Anything)이라는 책의 첫 페이지를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말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협상 전략은 항상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은 하나의 웅변이었다.” 타협의 정신은 양보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의 이익을 희생할 각오 없이 타협은 이루어질 수 없다. 타협은 나의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보다 내가 타협을 위해 기꺼이 양보했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 진정한 타협의 정신일 것이다.    

  

평행하는 두 개의 선은 아무리 길게 연장해도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선이 1도만 구부려도, 아니 0.1도만 밑으로 향해도 두 선의 만남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두 선 모두를 움직일 필요도 없다. 하나의 선만 바뀌어도 접점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0.1도의 변화, 그것이 타협의 원리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갈등과의 타협도 마찬가지이다. 탐욕을 아주 조금만 줄여도, 증오의 감정을 조금만 누그러뜨려도, 미움의 감정을 조금만 사랑을 향하여 움직여도 타협은 이루어진다. 타협은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타협의 기본 원리는 언제나 작은 양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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