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의 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Oct 24. 2020

배신할 수 있는 것은 양심뿐

배신의 시대와 믿음의 포기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우리가 배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양심뿐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신이 만들어내는 양심의 가책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신을 당한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배신은 결국 그 이전에 믿음이 있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었던 연인, 믿었던 친구, 믿었던 누군가, 믿었던 무언가의 배신. 믿음은 배신의 어머니이다. 그래서 인간은 믿음에 대한 불신에 빠진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스스로에게 배신당한 경험 때문이다. 꿈의 배신, 능력의 배신, 건강의 배신, 돈의 배신... 무수히 이어지는 배신의 행렬 속에서 우리는 자문한다. 인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인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배신했던 베드로, 은화 30냥에 스승을 판 유다, 그 배신의 역사는 반복되는가? 로마의 공화정 말기, 시저는 자신에게 항거했던 브루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높은 관직을 준다. 그러나 공화국의 이상에 빠져있던 그는 시저가 황제를 꿈꾼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한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시저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배신에 대한 절망의 절규였다. 오늘의 우리는 배신의 역사를 이어받고, 배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을 포기하는 불신의 늪에 빠지고 만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키스

국가에 대한 배신, 국가의 배신     

  

국가에 대한 배신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신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던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나치 독일에 맞선다. 하지만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무기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1944년 독일이 항복을 하고, 평화를 되찾은 프랑스는 점령기간 동안 나치에 협조했던 프랑스인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반민족 행위로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수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만 무려 11,200명에 달했고, 약 일만 명에게는 강제노역, 약 3천 명에게는 중노동 무기형이 선고되었으며,  4 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공민권이 박탈되었다. 특히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4년 동안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 폐간조치를 하고 신문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들이 대중의 여론을 호도하여 나치의 정책수행을 도왔다고 판결했던 것이다. ‘르 피가로'(Le Figaro), '라 크로와'(La Croix), '르 탕(Le Temps)'지 등 3개 신문만이 나치 점령기간 중에 자진 휴간함으로써 언론의 순수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국가에 대한 배신은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한 시기에 일어나기 쉽다. 식민지의 역사를 살았던 많은 국가에서 아직도 역사에 대한 청산의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 생존을 위해 국가를 배신하거나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과연 국가가 어디까지 단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더 큰 권력의 편이었고 국가의 편이었다. 역사는 무수히 많은 배신자의 명단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개인에 대한 국가의 배신도 기록하고 있다.


애국심은 국가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며 나의 조국이 나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에 대한 믿음이다. 18세기 초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은 자신의 희곡 ‘카토’(Cata, a Tragedy)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조국을 위해 단 한 번 밖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What a pity it is that we can die but once for our country!) 극단의 애국주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연합군의 진군을 막는 수단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편성했다. 조종사들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연합군 함대에 비행기와 함께 부딪히는 자살 공격을 가한다. 1945년 한 해, 오키나와를 방어하기 위해 1,000명이 넘는 특공대원이 가미카제 공격에 참여해 귀중한 생명을 버린다. 애국적 정열을 이용한 국가의 만행이다. 조국에 대한 헌신의 정신을 왜곡하고 교묘히 이용하는 국가의 배신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배신    

  

그러나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신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아테네의 타이몬’은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인간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재산이 무한할 것으로 착각한 타이몬이 아첨하는 무리들에게 재산을 탕진하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에 가득 찬 채 숲 속에서 고립된 삶을 산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빈털터리가 된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자 인간에 대한 극렬한 배신감에 몸부림친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 아테네와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혼돈이여 오라!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역병이여... 썩어 문드러진 아테네 인들을 뒤덮어라... 탐욕과 방종이 젊은 놈들의 마음과 뼈 속에 스미게 하고 미덕을 거스르게 하여 폭동 속에 익사케 하라. “ 배신감이 그를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에 사로잡힌 괴물로 변화시킨다. 그렇게 문학의 세계에 ‘배신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전형이 창조된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E. M. Foster)는 국가에 대한 배신과 친구에 대한 배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국가를 배신할 베짱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포스터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 우정을 통한 유대를 더 깊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국가라는 개념은 추상적일 수 있다.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간혹 왜곡된 민족주의의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들은 극단적 애국주의의 역사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배신은 긴 역사적 안목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저지르는 배신은 즉각적인 고통과 가책을 수반한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가족에게 배신당할 때, 그리고 오랜 세월 젊음을 바쳐 일했던 조직에 의해 배신당할 때, 인간은 끝없는 절망에 빠진다.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Arthur Miller)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은 어떤 면에서 배신에 대한 연극이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아왔으나 어느 날 회사 대표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젊은 사장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삼십사 년 동안이나 이 회사를 위해 일 해 왔소. 그랬건만 이제 보험료조차 치를 수가 없어요. 오렌지 알맹이만 먹고 껍질은 버린단  말이요? 하지만 사람은 그런 과일과는 다르지요.” 로먼은 장남에게 걸었던 기대에도 배신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출장 중에 호텔방으로 창녀를 불러들이고 그녀에게 스타킹을 선사한 자신의 행위를 아들이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의 믿음을 배신했던 것이었다. 그렇듯 배신으로 뒤틀린 그의 삶은 결국 자살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가족에 대한 더 큰 배신일 수밖에 없었다. 배신의 비극이다.         

":오렌지 알맹이만 먹고 껍질은 버린단 말이요?" (세일즈맨의 죽음)

배신과 가책    

  

사람에 대한 배신과 그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가책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 콘래드의 ‘로드 짐’(lord Jim)이다. 배의 항해사였던 주인공 짐은 순례 길에 나선 이슬람교도들을 가득 실은 낡은 화물선에 승선한다. 운항 중 배의 낡은 철판이 휘어지고 물이 새어들기 시작한다. 800명에 가까운 승객을 태웠던 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생존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승객을 깨워 위험을 알린다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아비규환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자 선장과 승무원들은 승객을 버리고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기로 결정한다. 승객과 더불어 최후를 맞으려 했던 짐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승무원들이 타고 있던 구명정으로 뛰어내린다. 승객들의 생명에 책임이 있던 승무원들의 배신이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고 비겁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침몰하리라 믿었던 낡은 배는 기적적으로 지나가던 프랑스 군함에 구조된다. 그리고 배를 버린 채 도망했던 승무원들은 세상의 극심한 비난에 직면한다. 짐은 그러한 비난과 저주를 애써 피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일상의 삶을 회피한다. 고립감 속에서 방황하던 짐은 우연히 말레이의 파투산이라는 오지로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억압받던 부족을 구해주고 그들로부터 '로드(Lord)'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문명의 세계와 죄의식에서 벗어나 평화로움을 누리던 어느 날, 몇 명의 백인들이 그들의 세계를 침범한다. 짐은 타협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들은 짐을 배신하고 족장의 아들을 살해한다. 이미 배신을 통한 가책의 고통을 겪었던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족장이 쏜 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신뢰를 배신할 수 있다. 그만큼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로드 짐처럼 그 배신에 대한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나의 배신조차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리하여 자신의 배신에 대해서 조차 무감각해진 우리들이다. '내 탓이요‘(mea culpa)의 정신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배신이 제도와 관행이라는 핑계로 면죄부를 얻고 또 다른 배신이 서슴없이 저질러지는 세상에서 오늘의 우리는 배신의 가책과 그 고통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가. 죄의 고통을 지고 가는 로드 짐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배신을 하거나 당하거나 그 가책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가책의 고통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다소라도 회복하여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짓과 진실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