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세상, 코로나로 통일하라!

어리석은 자의 넋두리

by 최용훈

오늘날 우리는 분열의 세계에 살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되어있던 미국 사회는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현직 대통령인 트럼프와 반 트럼프 진영으로 갈라서고 있다. '양보와 인정'이라는 전통은, 잠시이기를 바라지만,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구 소련에 개방과 개혁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등장으로 유럽의 공산주의가 종말을 맞이하자 소위 ‘냉전’(Cold War)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으로 양분된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분할을 의미하였다. 소련이 무너진 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고, 과거 미-소에 의해 형성된 양극체제(bipolar system)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unipolar)로 변화되었다. 절대적인 힘을 기반으로 평화를 이루었던 고대 로마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는 미국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평화는 기대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는 평화로웠는가? 새로운 사회주의 강국 중국의 등장으로 또다시 세계는 패권을 위한 전쟁터로 바뀌고 있다. 미중 간의 무역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숨을 죽이고, 한 때 ‘세계의 경찰’을 자임했던 미국은 다시 한번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겠다는 구호와 함께 강대국으로서의 도덕성과 책무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세상은 다시 미국을 지지하는 국가와 미국을 반대하는 국가로 나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은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 여성 소수자들의 여성해방 운동으로 뉴욕과 워싱턴의 거리들은 깃발과 배너로 가득했다. 그렇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상처 속에 성숙해가는 것으로 보였다.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고 흑인들의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소외된 흑인들의 방황이 계속되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오만은 여전히 유색인종들의 당연한 권리를 파괴하고 있다.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 앞에 하이픈으로 연결된 형용사들이 사용된다. 아프리칸-아메리칸, 아시안-아메리칸, 멕시칸-아메리칸... 하이픈으로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백인들뿐이다. 미국은 아직도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백인 중심의 사회이고 그들 이외의 인종과 민족들은 그저 타자(他者, The others)로 간주된다. 그렇게 인종적으로 양분되었던 미국이 이제는 정치적으로까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역사의 물결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은 또한 '나'와 '나 아닌 타인'으로 양분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증오심을 끌어올려 폭력을 가한다. 증오범죄! 나와 다른 피부색, 나와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성적 정체성이 증오 범죄의 이유가 된다. 특히 U. N. 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적 정체성이 인종이나 종교보다 더 증오의 대상이 된다고 하니 그저 아연할 따름이다. 카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한다. 그러나 그의 세상은 관념과 환상의 영역이었고, 그의 행위는 문학적 메타포였다. 반면 거리를 지나는 유색인종, 동성애자, 비기독교도들은 살아있는 현실이고, 피 흘리는 육체를 지닌 이웃들이다. 나와 나 아닌 인간. 그렇게 세상이 나눠진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식량은 넘쳐나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매 순간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뫼르소의 환상은 이제 엄연한 현실에 대한 예언이 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은 아주 오래된 역사의 과정인 줄 알았다. 자본주의의 현실이 공산주의의 허황한 이상을 치유해줄 길을 찾아낼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가진 자의 거드름과 못 가진 자의 고통스러운 외침으로 가득하다. 정부의 정책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기 일쑤고, 정치가들,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오래된 격언을 되뇌고 있다. 그렇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오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고대의 세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었었다. 그 양분된 세계에 끼어든 것이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태생으로 구분되는 귀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사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귀족은 될 수 없으나 귀족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패러다임을 깨고 자기들만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상인들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시장에 지배계층이 끼어드는 것에 반대하고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중산층의 선언문이다. 그렇게 중산층의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부를 축적한 국가들이 신생 국가들의 개발과 발전의 희망을 짓누르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세계화니 WTO 체제니 하는 것 역시 힘 있는 자들의 일방적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는 중에 세상은 또다시 지배와 피지배로 환원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이 시대의 슈퍼 리치들이 경제의 신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성공의 신화가 순박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떨구는 부스러기 같은 부의 조각에 집착한다. 그렇게 현대의 금권 정치는 새로운 군주와 새로운 노예들을 양산한다. 그뿐인가. 힘든 노동으로 받은, 얼마 되지 않는 급여에서 쪼갠 세금을 자신들의 재산인 양, 시혜라도 베풀 듯, 제 멋대로 사용하는 정치가와 관료들은 도대체 무엇을 알고, 무슨 생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펴는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그저 불안할 뿐이다. 마몬(Mammon, 돈의 신)들은 세상을 굽어보며 가난한 대중을 탓한다. 게으르고,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아둔한 대중에게 눈을 흘기고, 돌아서서 탐욕의 미소를 흘린다. 기업들은 재투자라는 명목으로 천문학적 이득을 창고에 쌓아둔다. 그리고 그것을 담보로 금융을 일으키고 또다시 자신들만의 부를 창출하면서도, 그 커다란 파이의 한 조각을 내미는 것조차 아까워한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자본 중심 세계의 민낯일 뿐이다.


우리 사회 역시 반으로 쪼개져 아우성을 친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허튼 구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어리석은 백성들은 알지 못한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정책의 면에서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우리의 보수와 진보는 도대체 무엇으로 차별화되는가? 수십 년 간 서로 다른 무리로 뭉쳐 싸우다가 정권을 잡은 쪽이 다른 쪽을 적으로 몰아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것 외에 어떤 이념적, 정책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가. 연일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여야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상대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그 뻔뻔함과 오만함에 그저 경악할 뿐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언론에게는 가짜 뉴스의 낙인을 찍어버리니 못난 배성들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그렇게 양분된 세상에서 한 가지 통일된 현상이 존재한다. 어리석은 백면서생의 냉소적인 지껄임 쯤으로 치부해도 좋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을 하나로 묶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스스로 나선 백성들뿐이다. 여러 달 계속되는 생업의 정지,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주변의 모두가 사라진 이 허망하고 황량한 황무지에서 그들은 마스크로 무장하고 바이러스라는 적의 눈에 띌까 조심스레 창밖의 거리를 주시한다. 누구와 싸워야 할지 모른 채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나약한 병사들은 그래도 이 세상을 지키겠노라고 대열을 가다듬는다. 역설적으로 COVID-19의 세상은 인류가 어떤 미래를 살아야 하는 가를 알려주고 있다. 모두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자는 그저 몽상가일 뿐인가. 하지만 기억하라. 당신만이 유일한 몽상가가 아님을. 분열된 세상, 코로나로 통일하라! 이제 갈라진 틈새를 메워야 한다. 그 틈새로 스며드는 햇빛을 기다리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둡지 않은가. 이제 코로나라는 도전에 맞서 인류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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