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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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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10. 2020

말, 말, 말, 그리고 생각의 크기

언어는 생각이고 행동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말과 관련된 논란이 많다. 사실이 아닌 말, 과장된 말, 비틀린 말, 상처 주는 말, 책임지지 못할 말, 거친 말, 비겁한 말, 비꼬는 말, 오만방자한 말, 말하는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 그런 말들의 홍수 속에서 분노하고, 좌절하고, 상처 입는 우리 모두는 그래서 입을 닫는다. 침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폭포수 같이 쏟아내는 말.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지혜일지도 모르는 시대에 매일처럼 벌어지는 언어의 범람과 폭력을 목격하며 언젠가는 조용해지겠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언어는 생각이고 그것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어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을까? 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생각은 지극히 원시적인 감각에 불과하다. 고통, 두려움, 환희, 슬픔처럼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길어지면, 언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말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에게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말하는 사람이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유도한다. 그래서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언어는 세상을 단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해에 계절은 몇 개나 있는가? 우리가 인식하는 계절은 네 개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계절을 네 가지로 구분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계절을 나누는 말이 네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일곱 빛깔 무지개라 한다. 하지만 스펙트럼을 통과하는 무지개의 색은 무한하다. 다만 그것 모두를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언어는 세상을 구성하고, 우리는 언어가 만들어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    


언어와 생각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말이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고, 형성하고, 규정한다. 따라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도 있다. 느낌! 그것은 말없이도 떠오르는 생각이다. 황혼에 물든 들녘을 바라보는 순간의 경외심,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까닭 모르게 솟아오르는 고독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투 속에 감춰진 그 향긋한 군고구마의 냄새. 그것을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러한 감정들은 말로 바뀌는 순간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게 말로는 옮길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아스라한 많은 추억들은 언어 없이 느낌으로만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언어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아름다운 자연, 따뜻한 미소, 돌아갈 수 있는 집, 누울 수 있는 방, 해야 할 일, 영혼을 정화하는 시. 우리의 삶에 감사해야 할 많은 것들,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길 원할 때, 우리는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순간, 우리는 불확실한 언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언어가 지니는 의미의 혼란을 경험한다. 언어의 불확실성, 의미의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것이 현대인이 살아갈 위험한 무대이다.       


언어의 힘    


그러나 우리의 삶에 미치는 언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구에 따르면 특정 단어에 노출되면 뇌는 실제 자극을 받은 것처럼 반응한다고 한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노인을 연상하는 다양한 단어를 불러주고 이후 그들의 태도를 분석한 결과, 실험 참가자들의 발걸음이 평상시보다 느려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반대로 젊은이를 연상하는 단어에 노출된 사람들은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단순한 실험이지만 언어가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긍정적이고 사랑에 넘치는 언어가 필요한 이유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말은 하는 사람의 사고의 폭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우리 마음속 사고의 일단이 말속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과 인간관계에서 말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입술의 30초가 마음의 30년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한마디 말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은 인생의 축복이다. 미국 작가 앤디 앤드루스(Andy Andrews)의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The Traveler's Gift)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폰더는 40대 후반의 실직한 가장이다. 딸의 수술비도 구할 수 없던 그는 절망한다. 그리고 불의의 교통사고까지 당해 의식을 잃고 꿈처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꿈속에서 그는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만나 그 들의 소중한 말을 듣는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폰더 씨의 절망은 위대한 인물들의 언어 속에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가브리엘 대천사는 그에게 이루지 못한 꿈, 공상으로 끝난 계획들로 가득 찬 창고를 보여주며 묻는다. “당신의 인생도 저기에 넣어두고 싶은가?” 그렇게 한마디 말이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생각의 힘     


언어가 끌어내는 생각의 힘은 무한하다.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을 이끌었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나’(Cogito, ergo sum)를 확실한 지식의 징표인 명징성의 기준으로 삼았고, 그 기반 위에 그의 거대한 철학적 체계를 구축한다. 생각은 존재의 표식이다. 말과 생각,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정교한 존재의 체계이고, 상상의 체계이다. 느낌이 아닌, 언어로 하는 생각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이성적 통찰이다. 18세기 독일의 언어철학자 하만(Johann Georg Hamann)은 “이성은 언어이며 로고스“라고 말한다. 언어와 논리가 만들어낸 합리적인 이성이 역사를 진전시킨 원동력이다. 아인슈타인은 다섯 살 생일에 아버지로부터 나침반을 선물로 받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는 자신의 상대성 이론이 그 나침반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나침반을 움직이는 더 큰 힘, 그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와 법칙에 관심을 지니게 된다. 그 나침반이 곧 언어이고 논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상상력이 된다. 언어는 생각, 상상력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반드시 문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미국의 사학자 미셸 루트번스타인(Michele Root-Bernstein)은 그녀의 남편인 생리학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bernstein)과 함께 쓴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에서 ‘몸으로 생각하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는 언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의 무의식적인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 생각 없이도 몸으로 반응해 공을 쳐내는 테니스 선수, 그들에게 있어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몸의 반응은 일종의 언어이다. ‘생각의 탄생’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어 그 진동으로 음악을 듣고, 마루의 진동을 느낌으로써 춤을 보았다. 그리고 무용수의 허리를 붙들고, 솟아오르는 ‘도약’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헬렌 켈러는 그녀만의 생각의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몸의 느낌, 감각이 그녀의 언어였던 것이다. 생각은 곧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창조를 꿈꾼다. 그 창조적인 상상력은 이렇듯 말, 느낌, 몸의 언어를 통해 발전하고, 마침내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냈던 것이다.     


배려와 사랑의 언어    

테레사 수녀   "친절한 말의 메아리는 넓게 퍼져나간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고 생각은 언어의 원천이다. 생각 없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와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한다. 모습, 말, 글, 마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모습과 언어와 마음으로 남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자신의 실체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언어와 생각은 늘 남을 배려하고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언어는 타인을 향하고 생각은 자신을 향한다. 타인에게 즐거움, 행복감, 자신감을 주는 언어와 생각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맞추어 말을 해야 한다. 목수에게는 목수가 사용하는 말을 써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말들로 우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는가.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말, 친절한 말은 “짧고 쉽지만 그 메아리는 길게 퍼져 나간다.” 미국의 개신교 목사 개리 채프먼(Gary Chapman)은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Five Love Language)에서 ‘말’ 이상의 ‘말’을 제안한다. 남을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그리고 육체적 접촉. 그가 설명하는 사랑의 언어들이다. 그렇게 언어가 말을 넘어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의 말,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은 하나가 된다.     

미국의 시인 에머슨의 표현을 빌면, “말이란 말하는 사람의 이면에 숨은 인간의 크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가장 솔직한 지표이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설득하라. 자신을 확신시키지 못하는 어떤 말도 남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도구를 정비하지 않는 한 우리의 생각은 힘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의 힘을 키우지 못하는 한 우리의 언어는 의미 없는 웅얼거림으로 끝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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