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암흑의 그림

빛과 어둠의 공존

by 최용훈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삶의 비극을 작품 속에 그대로 그려냈다. 화가로서의 경력의 절반은 스페인의 화단에서 화가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1792년 질병으로 청력을 잃으면서 그의 첫 번째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결국 그의 정신도 서서히 무너져 갔다. 하지만 이 암흑의 시기에 고야는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에칭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판화들은 작가의 마음만큼이나 황량했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고통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간주된다. 화가로서의 긴 여정 가운데 고야는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에서 비관적이고 어두운 주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그의 회화, 드로잉, 에칭과 프레스코에 그려내었다.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새턴, 1819-1823


질병에 이어 또 다른 비극이 덮쳐왔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의 침략으로 스페인은 황폐화되었다. 고야는 자신이 목격한 죽음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의 작품 속에 표현했다. 계속되는 정신적 발작은 그의 남은 생애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75세 때부터 그는 자신의 집 벽 위에 이른바 ‘암흑의 그림’(Black Painting)으로 알려진 벽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어둡고 사악한 악마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아들을 잡아먹는 새턴’(Saturn Devouring His Son)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악마를 두렵고 환상적인 이미저리로 표현하였는데, 그 악마의 모습은 단지 그로테스크 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해 공포를 하나의 이야기로 치환시키고 있다.

고야는 스페인 아라곤에 있는 푸엔데토도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난다. 얼마 후 부모와 함께 사라고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열네 살 때부터 화가 마르티네즈(José Luzán Martínez, 1710–1785)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가 태어났던 1746년은 페르디난드 6세의 치세였으나 곧 카를로스 3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변화를 추구했던 계몽군주 카를로스 왕은 급속한 경제, 산업 및 농업의 개혁을 시행하였다. 고야는 이 계몽의 시대에 화가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후 그는 화가였던 수비아스(Francisco and Ramón Bayeu y Subías) 형제가 마드리드에 세운 스튜디오에 함께하게 되고 그들의 누이인 조세파(Josefa)와 결혼한다. 두 차례 미술대회에 출품했으나 수상하지 못하자 그는 1770년 이태리를 여행하며 그 르네상스의 발생지에서 인간의 이성과 예술의 본질에 새로이 눈뜨게 된다.


고야와 스페인 왕가의 관계는 1774년 시작된다. 독일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가 스페인 궁정에 걸어둘 태피스트리 제작에 고야를 참여시키면서 시작된 이 관계는 네 명의 군주를 거치며 그의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두 곳의 궁정에 걸린 63개의 태피스트리는 9개의 사냥 모습을 포함해 유쾌한 로코코 풍으로 부자와 가난뱅이, 젊은이와 늙은이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즐기는 여가 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야의 태피스트리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1789년에는 카를로스 4세 치하에서 수석 궁정화가로 승진하였는데 이 해 프랑스는 혁명으로 군주제가 몰락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는 그의 사촌인 루이 16세를 도울 마음이 없었고 결국 1792년 프랑스의 왕정은 무너진다. 하지만 공화정의 자유분방함 속에서 은밀히 황제를 꿈꾸었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또 다른 공포와 파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야는 질병의 후유증으로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1799년 고야는 카프리코스(The Caprichos)라는 이름으로 80 편의 우화적인 에칭 작품들을 앨범 형태로 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만든다'라는 제목의 판화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침범하는 마녀, 유령, 환상의 생명체 등이 악몽 같은 꿈 속에 등장해 이성에 반하는 세상을 그려낸다. 르네상스 이후 이성의 시대에 번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주제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당시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 대한 대규모의 초상화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고야의 에칭 (이성이 잠들면 괴물들을 만든다)


계몽군주 카를로스 4세의 치세가 끝나고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한다. 이 침략 전쟁으로 스페인 시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이루어지고 심지어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조세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왕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잔인성에 적대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나파르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프랑스 지도자들의 초상을 그린다. 스페인의 왕조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 다시 회복되었다.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디난드 7세가 즉위하였으나 그는 선왕들의 계몽적 안목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고 절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작한다. 프랑스 점령군에 부역하였다는 의혹에 부딪혀 고야는 프랑스 점령 정권에 대한 스페인의 봉기를 찬양하는 두 편의 그림,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린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마드리드 시내에서 벌어진 저항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말에 탄 프랑스군에 대항해 싸우는 영웅적인 스페인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이 외에도 고야는 '전쟁의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85편의 판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들은 고야의 생전에는 발표되지 못하였다.


고야, 1808년 5월 2일


페르디난드 7세의 치하에서 왕가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했던 고야는 마드리드에서 정치적, 지적 활동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다. 1820년에서 1823년 사이 고야는 시골에 있던 자신의 집(귀머거리의 집)에서 개인적인 그림을 프레스코 형태로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암흑의 그림'이라고 알려진 이 벽화들은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스페인에서의 정치적 전개에 불만을 품은 고야는 마침내 1824년 건강 상의 이유를 내세워 궁전 생활을 청산하였다. 이후 그는 스페인의 자택과 파리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1828년 사망한다.


고야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과 논리, 질서와 진보라는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그 시대의 거친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육체의 고통과 함께 전쟁과 정치적 혼돈 속에 고야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폴레옹 치하에서의 배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역사 청산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유럽 제국의 왕가들의 관계가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는 점에 미루어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청각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빛과 어둠을 표현한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암흑 속에는 빛이 있다. 그렇게 빛과 암흑이 공존한다. 그의 어두운 그림들 조차도 신화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은 미술사의 분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야, '암흑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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