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대 후반이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뜬 극단 ‘여인극장’의 연출가 강유정 선생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그린 대본이 있는데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말씀이셨다. 미국의 극작가 테렌스 맥널리(Terrence McNally, 1938~2020)의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라는 작품이었다. 작가인 맥널리 역시 올해 3월 코로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내 기억 속의 연극 ‘마리아 칼라스’는 이제 원작자와 연출가 모두를 잃은 셈이다. 내가 번역을 맡았었는데 한 편의 희곡 속에 한 인물의 삶을 절묘하게 묘사한 뛰어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가 희곡을 통한 자서전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마스터 클래스’는 희곡을 통한 전기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렇게 필자는 ‘오페라의 성녀’라 불리던 마리아 칼라스와 조우하게 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얼마 전 우연히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에 나오는 ‘광란의 아리아’를 그녀의 짙은 목소리로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을 격해 그 시절 기억했던 마리아 칼라스를 다시 떠올린다. *마스터 클래스는 그녀가 줄리아드에서 성악가들을 위해 진행했던 특별한 수업이었다.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는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였다. 그녀의 그리스 성은 ‘칼로게로풀로스’였다. 약사였던 아버지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스의 성을 미국식으로 고친 것이 ‘칼라스’였다. 그리스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큰 눈과 높은 코는 고대의 아테네 여인을 연상시킨다. 1977년 5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숨질 때까지 그녀의 삶은 무대 위의 그녀 못지않게 극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오페라틱 소프라노(operatic soprano)였으나 서정적이고 연극적인 재능을 목소리와 결합하여 고전적인 콜로라투라(coloratura: 가장 높은 음역에 속하는 소프라노로 장식적, 기교적으로 화려한 선율을 노래함)를 20세기 중반에 다시 재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7년 부모의 이혼 후 칼라스는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이주하고 편모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비만이었고 근시였던 그녀는 늘 어머니가 자신의 언니만을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우울하고 외로웠던 그녀에게 오직 음악만이 유일한 위안이었고 안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결점을 음악을 통해 극복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는 아테네 음악원에서 소프라노 엘비라 데 히달고(Elavira de Hidalgo) 아래서 성악을 공부하고 몇 차례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여러 차례 오디션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중 베로나에서 공연된 아리고 폰키엘리(Arrigio Ponchelli)의 ‘라 지오콘다’(La Gioconda)에 출연 기회를 얻어 오페라 가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였으며 마리아도 그곳에서 그녀의 첫 남편을 만난다. 죠바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ista Meneghini). 그는 부유한 이태리의 사업가였고, 예술 애호가였다. 그는 스물 아홉 살 연하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그는 그녀의 연인이자 남편, 열렬한 팬이자 매니저로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도움으로 그녀는 1950년대 세계를 누비는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베로나에서 만난 또 한 사람이 지휘자 세라핀이었다. 그의 가르침으로 그녀는 이태리의 모든 극장을 점령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무대 위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콜로라투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고 또한 지극히 극적이었다. 음악과 연극에 대한 그녀의 비범한 재능으로 마리아 칼라스는 곧 오페라계의 선두에 나서게 되고, 당시 소홀히 여겨졌던 벨리니(Vincenzo Bellini)나 도니체티의 19세기 벨칸토(Bel Canto) 작품들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0년이었다. 1952년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였고, 1954년에는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벨리니의 노르마(Norma)공연으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켜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소프라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59년 코벹트 가든에서 공연된 오페라 '메데아'의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 처음 서게 된 것은 베르디의 ‘아이다’에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공연 직전 개인적 사정으로 무대에 서지 못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라 스칼라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관객들은 냉담했고 비평가들도 부정적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고 억지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듬해 이루어진 그녀의 두 번째 공연은 첫 공연의 기억을 말끔히 씻어냈다.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1950년 대 말까지 마리아 칼라스는 유럽 최고의 극장 라 스칼라의 주역이 되었다.
라 스칼라에서의 성공은 그녀의 삶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었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낸다. 영국의 희곡작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Pygmalion)을 영화로 만든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에 출연한 오드리 햅번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을 바꿔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영화 속 히긴스 박사가 런던의 꽃 파는 소녀를 변화시키듯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녀는 짧은 시간에 무려 30kg 이상을 감량함으로써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신비로운 그리스풍의 얼굴에 큰 키의 늘씬한 몸매로 변화된 그녀는 이태리의 유명한 영화감독 루치노 비스콘티(Lucino Visconti)를 매료시켰다. 이후 칼라스와 비스콘티는 함께 다섯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그중에는 1955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오페라 여가수들에게는 육체적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중저음과 고음에서 각각 다른 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극적인 효과와 열정을 더해 자신의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그러한 목소리의 특성을 이용해 다양한 역할을 해석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그녀는 한 주 안에 바그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력한 여신이자 전사의 역할뿐 아니라 또 다른 작품 속 낭만적인 여인의 역할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연기함으로써 평론가들을 경악시키기도 하였다. 그녀의 독특한 소리와 스타일은 기존의 서정적인 무대 전통을 무너뜨렸다. 다면적인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오페라 장르에 연극적 요소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무대 요소는 이후 오페라 가수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창법이나 무대 기법을 모방하는 것은 많은 오페라 가수들에게는 위험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독창적인 발성과 천부적 연기력을 재현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단점으로 지적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수들의 입장에서도 섣부른 모방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망치는 길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리아 칼라스만의 장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위대한 디바로서 뿐 아니라 그 격정적인 성격으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기자들 앞에서 역정을 부리고 분노를 표출한 것이 수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언론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그녀는 자신에 관한 모든 기사와 평론을 수집하고 심지어는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자신의 연애 이야기까지 마구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되었고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칼라스는 임의로 공연계약을 파기하고, 공연 직전에 출연을 포기하는 등 계속해 불화와 분쟁을 일으킨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관람하는 공연에서 느닷없이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하는가 하면 미국 메트로폴리탄 극장과 계약서를 쓸 때는 “다른 프리마돈나보다 1센트를 더 달라”며 자신이 최고임을 계약서에 명시하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였다.
1964년 칼라스는 비제(Bizet)의 ‘카르멘’(Carmen)을 녹음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칼라스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과로와 급격한 체중 감량으로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의 이러한 어둡고, 거슬리고, 위험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카르멘의 열정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보헤미안적인 성격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고, 그녀의 카르멘 앨범은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카르멘을 무대 위에서는 결국 연기하지 못하였다. 1965년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아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며 다시 만난 옛 동료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투어에 나섰을 때 무대 위의 마리아 칼라스는 여전히 많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옛 목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만 뒤였다. 한때 그녀는 언니인 재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목소리를 잃었으니 죽고 싶은 마음이야. 목소리가 없으면 난 뭐지?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녀가 그리스의 '선박왕'이자 세계적인 부호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Aristotle Onasis)를 만난 것은 1959년 그가 개최한 선상 파티에서였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남편은 애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나 매니저와 같은 존재였고, 한 여인으로서 새롭게 찾은 사랑에 그녀는 무섭게 몰두한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모든 행사에 장식품처럼 등장하였고, 그의 애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한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사랑의 행각에 빠져 음악을 거의 포기한다. 그럴수록 그녀의 목소리도 더욱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1968년 오나시스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과 결혼한다. 배신감과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는 긴 시간 파리의 아파트에 칩거한다. 세기의 커플이라 불리며 세간의 관심을 받던 오나시스와의 염문이었기에 칼라스가 겪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
마리아 칼라스는 말년을 홀로 파리의 아파트에 은거했다. 연인이었던 오나시스가 1975년 사망한 뒤로는 더욱 폐쇄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2년 뒤 그녀 역시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전설이 된 많은 예술가들의 경우처럼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과 근거 없는 추측들이 난무했다. 자살했다거나 타살당했다거나 하는 소문은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하지만 2010년 두 명의 이태리 의사들은 기존의 진단이었던 폐색전이란 병명을 뒤집고 퇴행성 성대 질환이란 새로운 사인을 주장하였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예술가의 죽음은 결국 예술의 종말과 함께 하는 것 같다. 목소리를 잃고 사랑마저 잃은 그녀는 종말을 맞이한 예술의 끝에서 망연히 삶의 끈을 놓아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