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 현대 미국의 시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문단의 거목이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이후 격변의 시대였던 1874년에 태어난 그는 이른바 ‘도금의 시대’라 알려진 19세기 후반 30년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제목이기도 했던 '도금의 시대'는 산업화를 통해 미국이 20세기 세계의 강대국으로 발 돋음 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와 초기 자본주의의 병폐인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풍요와는 달리 소외된 다수의 삶이 금칠한 납덩이처럼 침잠하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와 감성으로 미국 초기의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 지역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시인이었다. 네 차례의 퓰리처 상 수상을 포함해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온 프로스트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월트 휘트만(Walt Whitman) 이후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평가받았던 그는 미국의 전원 그리고 그 안의 소박한 미국인들을 평이한 문체로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계관시인’이라 불릴 만큼 영어권의 현대 시단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스트는 생애 첫 40년 동안은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열한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후 프로스트의 가족은 조부모와 함께 매사추세츠의 로렌스라는 마을로 이주한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서에서 동으로의 긴 여행이었다. 그가 서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북동부의 뉴잉글랜드를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로렌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트모스 대학에 진학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한다. 1895년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엘리노어와 결혼한다. 이후 1897년 다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2년 만에 중퇴한다. 1900년 프로스트는 아내, 아이들과 함께 조부가 그들을 위해 구입했던 뉴햄프셔의 농장으로 이주한다. 프로스트 가족은 그곳에서 12년의 시간을 보낸다. 프로스트와 엘리노어는 농장 생활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가축을 키우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농부로서의 삶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 프로스트는 시작(時作)을 위한 긴 습작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농촌 생활의 체험을 그의 시에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프로스트는 1894년 뉴욕시에 있던 한 문학잡지에 그의 첫 시 ‘나의 나비: 비가’(My Butterfly: Elegy)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12년 뒤 1906년 서른두 살의 나이에 ‘꽃다발’(The Tuft of Flowers)과 ‘존재에 의한 심판’(The Trial by Existence)을 발표했지만 그 후 그의 시를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을 수는 없었다.
1912년 프로스트와 엘리노어는 농장을 팔고 뉴잉글랜드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프로스트가 작가로서의 기회를 얻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곳으로 이주한 몇 달 만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출판사 한 곳이 그의 첫 번째 시집, ‘소년의 의지’(A Boy’s Will)를 출간한다. 그리고 일 년 뒤 두 번째 시집, ‘보스턴의 북쪽’(North of Boston)이 이어진다. 이 무렵 프로스트에게 시인으로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남이 이루어진다.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영국 시인 에드워드 토마스(Edward Thomas)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프로스트의 시에 대해 우호적인 평을 해준 첫 번째 시인들이었고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시인 토머스는 영국의 풍경 속을 오랫동안 걸으며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해 아쉬워했던 자신의 경험을 프로스트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1916년 이후 프로스트는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특히 출판업자 헨리 홀트(Henry Holt)와의 만남은 이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어진다. 그는 프로스트와 만나기 이전에 두 번째 시집 ‘보스턴의 북쪽’에 감동해 구할 수 있는 시집 전부를 구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프로스트는 한 때 재학했던 다트모스 대학과 미시간 대학에서 가르쳤고, 특히 앰허스트 대학과는 오랜 인연을 맺어 대학의 도서관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다. 1950년대에는 어네스트 헤밍웨이, T. S. 엘리엇 등과 함께 연방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있던 에즈라 파운드의 구명 운동에 나섰는데, 파운드는 2차 대전 당시 이태리의 파시스트들과 연루되었다는 반역 혐의를 받고 있었다. 파운드는 기소가 각하되어 구금에서 풀려난다.
프로스트는 평생 40회 이상 명예학위를 수여받았으며 1960년에는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61년 87세의 노인 프로스트는 44세의 새 대통령을 위해 특별히 지은 축시를 낭송하려 했으나 쌓인 흰 눈에 반사된 광선으로 글이 안 보여 축시 읽기는 포기하고 자작시 인 ‘아낌없이 주는 선물’(The Gift Outright)만을 암송하였다. 그의 축시는 나중에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로버트 프로스트(맨 오른쪽), 1961
그의 긴 생애 동안 프로스트는 시인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미국의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은 삶은 슬픔과 상실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1885년 그의 부친은 가족에게 8달러를 남기고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진다. 1900년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떴고, 1920년 프로스트는 그의 여동생을 정신병원에 보내야 했다. 그녀는 9년 뒤 그곳에서 사망한다. 프로스트의 가족에는 정신질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그의 어머니 모두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의 딸 어마(Irma)는 1947년 정신병원에 맡겨진다. 그의 아내 엘리노어도 여러 차례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 프로스트와 엘리노어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엘리엇은 여덟 살에 콜레라로 죽고, 둘째 아들 캐럴은 1940년에 자살했다. 셋째 딸 어마는 정신질환을 앓았고, 넷째 딸 마조리는 20대 후반에 아이를 출산한 직후 세상을 버린다. 여섯째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사망한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아내는 유방암까지 겹쳐 1938년 세상을 떠난다. 결국 남은 것은 둘째 딸인 레슬리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어마뿐이었다. 프로스트 자신은 1963년 1월 29일 전립선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유해는 버몬트 주 베닝톤에 있는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프로스트의 삶은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을까.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주변에서 떠나가는 경험이 유명한 시인으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프로스트의 삶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삶과 다르지 않았다. 그 긴 인생길에서 공허함에 사로잡혀 절망할 때 그는 나그네처럼 길을 떠난다. 홀로 가는 그 길에 눈이 내리고 외로움이 가슴에 사무치지만 잠시 멈춰 선 눈 내리는 숲가에 서서 가야 할 그 먼 길을 떠나리라 다짐한다. 그것이 인생임을 나지막이 읊조리는 노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