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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04. 2020

자만의 시대, 무오류의 환상

우리는 과연 옳은가?

자만심은 과도한 자부심, 자신감,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자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능력, 지식, 중요성, 그리고 성공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자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보장받고 있으며, 법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자만심은 그것에 빠진 사람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심각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무오류의 함정, 명분의 우월성,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적 믿음 등이 자만심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자만심은 대부분의 경우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자만심은 고대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가 가리키는 인간의 ‘비극적 결함들’ 중의 하나이다. 신화와 역사 문학 속에서 나타나듯 인간은 탐욕, 증오, 배신, 편견, 우유부단, 자기애, 의심, 시기심 등 비극과 몰락에 이르는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빠지기 쉬운 결함이 ‘자만심’(hubris)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공화정을 이루어낸 프랑스의 민중들은 저항을 통해 얻어낸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혁명 이후 프랑스는 치열한 권력다툼과 사회적 불만에 따른 갈등, 전쟁 등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든다. 국민들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을 원했고, 농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전쟁 영웅 나폴레옹이 등장하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수백만의 독일인은 그들의 선조가 자유를 위해 싸운 것만큼 열정적으로 자유를 포기했다”라고 언급한다.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는 만큼 불안한 자유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루이 16세의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의 혁명 민중은 그보다 더 억압적인 전체주의의 나폴레옹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심성에 기대어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도 결국은 그 자신의 비극적 결함으로 몰락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탄생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한다. 하지만 그 침략 전쟁은 나폴레옹군의 후퇴로 마감한다.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와 러시아 군의 초토화 전략(침략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전략)과 게릴라 전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쟁의 결과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했다. 자만심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와 이후의 프랑스 왕정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던 페젠삭(M. de Fezensac)은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에서 나폴레옹의 자기중심적 자만심이 패배의 원인이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어지는 몇 달 동안 러시아의 평원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도 같았다. 작전은 멋지게, 진정 멋지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좋은 징조가 나쁜 징조로 바뀌었음에도 극도의 에고이스트였던 나폴레옹은 그 중요성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그의 군대는 완전히,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파멸의 운명을 맞는다. 신들이 자만심에 대해 이보다 더 가혹하게 처벌한 적은 없었다.” (‘러시아 원정, 1812’)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본성과 그것이 삶에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가를 그려낸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예언적이다. 그리고 자만심은 문학 속에 늘 반복되는 주제가 된다.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였던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희곡 ‘파우스트 박사’(Dr. Faust)에서 파우스트는 그에게 무한의 힘을 줄 수 있으나 지옥의 저주를 내릴 수도 있는 악마와 거래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무시한다. 지상에서의 절대적 지식을 갈망한 파우스트는 마침내 악마에게 영혼을 팔 결심을 하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악령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가져오게 하고, 

학문적 애매함을 모두 해결하게 할까? 

아니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할까? 

그들에게 인도로 날아가 금을 캐오라고 하고, 

동양의 진주를 찾아 바닷속을 뒤지게 해야지.     


절대적 힘을 얻기 위한 파우스트의 탐욕은 그가 결코 악마의 저주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자만심을 보여준다. 인간의 자만심은 자신의 탐욕을 넘어서 신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전반 영국의 여류 소설가 메리 셸리(Mary Shaelley)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에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신처럼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자만심에 빠진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 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 그는 인간을 닮은 괴물을 만들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괴물이 생명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달아난다. 인간은 그렇게 무책임한 비겁자였던 것이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그의 자만심은 오늘날의 과학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인이었던 존 밀튼(John Milton)은 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신의 섭리에 저항하는 사탄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자만심을 보여준다. 사탄은 “천국에서 종으로 사는 것보다 지옥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이 낫다.”라고 선언한다. 한편 성경의 잠언은 “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신화 속의 인물들

자만심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호머의 ‘오디세이’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아내 페넬로페를 유혹하려는 사내들의 무례한 모습에서 어리석은 자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그들은 그 어리석은 자만에 대한 대가로 오디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 자신도 자만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하나뿐인 눈마저 멀게 하고 그의 동굴에서 도망쳐 나오지만 그 순간 자만심에 빠져 키클롭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키클롭스의 아버지이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을 위한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화 속의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너무 높이 날아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녹아내렸고, 운명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오디포스는 신들의 예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운명을 피해보려는 자만심에 빠진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디포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는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희곡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자만심은 결국 보복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의 처벌을 받는다. 오늘날 ‘네메시스’는 자만에 의해 초래된 처벌과 몰락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것을 하늘의 형벌, 즉 천형(天刑)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카로스와 오디포스

오늘의 우리는 어떤 자만심에 빠져있는가? 우리 사회는 정치와 정책의 자만에 빠져있다. 자신의 믿음과 결정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자신과 대립하는 집단의 의견과 믿음에 대해서는 오류를 감추기 위한 변명과 궤변일 뿐인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힘 있는 사람들끼리의 자만심에 가득한 이전투구는 사회의 건전하고 균형 잡힌 여론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신랄하고 심지어 저급한 말들이 난무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을 과장되게 신뢰한다. 필요하면 과거를 끌어내어 자신의 논리를 강화한다. 한쪽이 칼을 휘두르면 다른 쪽은 방패로 막고 긴 창을 내민다. 싸움을 중재할 시스템이나 버퍼 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눈길을 돌려 상대의 약점만을 흘겨본다. 마치 양보하는 한쪽이 자멸하고 말 것이라는 극단의 대결이 전개되고 있다. 국정을 살피고 민심을 돌봐야 할 정치권이 이 모양이니 일반 백성들 사이의 대립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코로나로 무너진 소통과 교감의 채널은 한쪽 구멍을 막고 아예 서로를 보려고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정책은 실패의 구실만을 찾고 있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정책의 효율성을 폄훼하고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측도 그 정책의 수용자도 어느 쪽도 상대를 살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무오류성과 과장된 능력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파멸과 몰락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틀릴 수 있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남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여유와 선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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