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에 ‘선택적’이라는 단어가 회자된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단어가 국회에서 검찰총장과 여당 의원 사이의 공방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선택적 함구증이니, 선택적 박탈감이니, 선택적 믿음 등 여기저기에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인간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선택적일 수 있으니 아무 데나 붙여도 말이 되는 수식어가 ‘선택적’이란 단어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편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란 말이 있다. 심리학의 용어로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혹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란 억지스러운 표현이 생기고,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생각마저도 선택적으로 판단하여 옳은 것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교직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집단 내의 편애’(in-group favoritism)로 인해 특별히 마음이 가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다. 선택적 관심 또는 선택적 애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언론의 기사들 가운데 자신의 기호에 맞는 것만을 편식하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애써 무시하는 경향을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렇게 언제나 자기 좋은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선택적 지각은 기대감이 인식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다양한 인지적 편향성을 가리킨다.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은 일련의 인지적, 인식적, 동기적 편향성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편향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편견에 대해서는 쉽게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선택적 인식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매일처럼 반복되는 무수한 외부적 자극에 똑같이 주의를 기울이기 어려워 결국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중 어떤 것을 고르고 선택하기 때문인 것이다.
‘칵테일파티 효과’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방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잇는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다. 자신과 가장 관련 있는 정보를 먼저 선택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택적 인식’은 현대의 광고나 마케팅의 주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에 약 1,500 가지의 광고성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그중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70여 가지, 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10 가지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광고와 마케팅의 관건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소비자들이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인지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두 시간씩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건강에 좋은 저지방 음식만을 먹고 온라인을 통해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흡연이 건강을 해칠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는 운동만 열심히 한다면 담배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택적 인식이며 판단이다. 그가 건강과 관련된 잡지를 보고 있다. 그곳에는 두 가지 광고가 있었는데 하나는 유산소 운동의 필요성에 관한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흡연의 위험을 경고하는 책이었다. 당연히 그는 유산소 운동에 관한 도서를 주문하였는데 아마도 흡연에 관한 광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만을 보려는 선택적 인식의 편향성이다.
이는 또한 선택적 인식이 세 가지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우선 선택적으로 노출되고, 선택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선택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런저런 정보에 노출될 때,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로써 선택적으로 이해하여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을 두고 이해를 달리하는 두 정당이 일 년 만에 원래 가졌던 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갖게 되었음은 같은 사람, 같은 생황에 대한 인식과 호불호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 년 전에는 내게 우호적이었거나 적대적이었던 인물이 완전히 다르게 인식되는 상황에서 그에 따른 관심과 이해 행동의 패턴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선택적 인식’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늘 발생한다. 타인에 대한 평가가 나에 대한 태도에 따라, 나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다반사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 그러나 ‘선택적’이라는 낱말에는 ‘편향성’이라는 의미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선택적’이라는 것은 편견에 따르는 오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도치 않은 행위를 ‘위협’으로 느낀다. 마찬가지로 ‘선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 피해의식과 적대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따라서 판단과 행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편향적 선택에 빠져 그러한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조차 반대 세력, 적대 세력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인지 부조화
한편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용어도 우리 사회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역시 심리학의 용어인 이 표현은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들을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의 믿음에 상충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편한 경험을 나타낸다. 따라서 태도와 행위 사이에 부조화를 느낄 때 사람들은 그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공격적이 되거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게 된다. ‘선택적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한 사람이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느끼는 순간도 ‘인지 부조화’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자기 합리화와 적대감의 함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지부조화’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우화가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이다. 자신이 기질 수 없는 포도를 가리켜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여우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닮아있다.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닌 사람을 불필요하고 배척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여우에 다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사람은 다음의 네 가지 선택 방법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첫째, 인지하는 내용에 맞추어 행동을 바꾸거나 둘째, 자신의 인지를 바꾸어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셋째, 새로운 인지를 통해 기존의 인지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넷째,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정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 문제는 이 모든 범주의 해결책이 원래의 행동이나 믿음이 그릇된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가장 분명한 해결책은 그릇된 행동이나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학적 인지의 개념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오컴의 면도칼’(Occum’s Razor)은 사고의 복잡성을 잘라버리고 단순한 논리를 택하라는 주장이다. ‘단순할수록 진실에 가깝다.’라는 믿음인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두 가지 표현이 나온다. 작품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는 피지배자의 모든 행위와 생각을 통제한다. 그래서 언어마저도 그들의 지배 이념에 맞추어 변화시킨다. 그것이 ‘뉴스피크’이다. 어휘는 모든 경우에 한 가지 뜻만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지배자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는 언어를 통한 사상의 통제이다. 그 통제된 사상 속에서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한 마음속에 품는 것이 ‘더블싱크’(Doublethink)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상반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를 옹립하고 새로운 언어로 어울리지 못하는 두 가지 생각을 한 몸에 품고 오웰이 예언한 디스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