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음악은 악보에 있지 않다. 음악은 그 둘 사이의 침묵 속에 있다.”

by 최용훈

“우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은 한 곳에 영원히 머물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A man of superior talent will go to pieces if he remains forever in the same place.”

모차르트는 ‘레퀴엠(Requiem, 진혼곡)을 작곡하던 중 갑자기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의문의 죽음은 200 여년 이상 무수한 소문과 추측의 대상이 되어왔다. 비교적 덜 알려진 이야기는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Freemasonry, 중세의 숙련 석공 길드에서 비롯된 세계 최대의 박애주의 비밀결사체)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1784년 그의 나이 28세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해까지 모차르트는 이 비밀결사와 관련된 음악을 작곡했는데, 남성 합창으로 연주되는 칸타타와 오페라 ‘마술피리‘(The Magic Flute)에 그가 꿈꾸던 프리메이슨의 이상이 나타나있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마술피리’의 대본과 구성이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폭로했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이 보낸 암살자들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치 시대의 독일에서 널리 퍼졌는데 1936년에 발표된 ‘모차르트의 삶과 폭력적 죽음’(Mozart’s Life and Violent Death)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유대인의 신앙과 프리메이슨의 행위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의 암살 목표가 되었다는 것은 정치적 이유에 의한 꾸며낸 이야기로 추정되는데 그와 관련해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문은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동료였던 프란츠 호프데멜의 부인이자 자신의 제자인 막달레나와 부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호프데멜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23세의 임신한 아내마저 살해한 후 모차르트의 장례식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장 빈번히 얘기되고 있는 또 다른 죽음의 비밀은 동시대 이태리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와 관련이 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해 그의 살해를 계획하고 독살하였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죽기 15일 전까지 극심한 고통과 부종으로 고생을 했는데 이러한 증상은 대체로 독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음악사가나 의료전문가들 모두 그의 사인에 대해 추측만 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의학적 사인은 류마티즘 열병인데 당시 비엔나에 전염성 열병이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주장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상한 고기에서 발견되는 산모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의학적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듯 독살이나 또는 다른 방식의 살인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죽음이 예상 밖의 갑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천재성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의 유럽은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잔재였던 준-자치제의 작은 공국(公國, principality)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결과 공국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비엔나, 프라하 등 작은 도시국가들의 정치권력은 귀족계급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들은 막강한 재력으로 음악가들을 지원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서 복잡한 기악 구성으로 이루어진 작곡 형태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잘츠부르크라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역사 상 가장 천재적인 작곡가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궁정의 부악장이기도 했다. 그는 아들의 음악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시작했고 늘 즐겁게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한 철저하고 치열한 연습과 완벽성을 추구했다. 다행히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교육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있었고, 곧 아버지의 가르침을 넘어서 다섯 살의 나이에 작곡을 시작하였다. 모차르트는 특히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와 바이올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이어 피아노와 오르간 그리고 비올라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모차르트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첫 콘서트를 가졌던 비엔나의 쇤브룬 궁

음악사에서 하이든, 베토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삶은 그다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젊은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를 유럽의 여러 도시에 데려갔고 궁정의 귀족들은 신동의 재능에 찬사와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은 모차르트의 마음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행과 연주로 어린 모차르트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이것이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3세가 되던 1769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떠나 이태리로 향한다. 그곳에서의 체류 기간은 거의 삼 년 간에 걸쳐있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알레그리(Gregorio Allegri)의 ‘미제레레’(Miserere,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가 연주되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악보 전부를 써내어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이 시기 모차르트는 밀라노 궁정을 위해 몇 몇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궁정의 악단에 자리를 얻었는데 그의 재능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심포니와 현악 4중주, 소나타와 세레나데,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바이올린 및 피아노 콘체르토도 작곡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만에 사로잡힌다. 다른 도시에서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1776년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돌며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원하는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1778년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모차르트는 방랑의 생활을 접고 1779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다시 대주교에 의해 궁정의 오르간주자로 고용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가로서의 자부심은 종종 그의 신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궁정에서 그는 자신이 대주교의 시종과 다름없는 신분임을 깨닫는다.


잘츠부르크에서 그는 일련의 미사곡과 오페라를 작곡한다. 그리고 1781년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의 즉위식에 참가하고 있던 대주교에 의해 비엔나로 소환된다. 하지만 과거 모차르트의 오만한 태도에 불쾌했던 대주교는 그에 대해 여전히 냉담했고, 잘츠부르크에서의 봉급에 절반도 되지 않는 급여에, 시종들과 같은 숙소를 쓰게 하고, 왕 앞에서의 연주도 금지하였다. 다툼이 잦아졌고 모차르트는 사직을 청하지만 대주교는 거절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를 해고하여 궁정에서 추방한다. 결국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작곡가이자 연주로서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한다. 친구들과 함께 오페라 극장에서 일하던 프리돌린 베버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곡을 출판하였으며 콘서트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1782년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하숙집 주인 프리돌린의 딸 콘스탄체와 결혼한다. 콘스탄체는 여섯 명의 아이를 출산했으나 불행하게도 그 중 두 아이만이 생존한다.

레퀴엠 악보

1782년에서 1783년으로 넘어가는 무렵 모차르트는 바흐(Bach)와 헨델(George Frederic Handel)의 음악에 매료된다. 이로 인해 여러 편의 바로크 풍 곡을 작곡하였고, ‘마술 피리’나 심포니 41의 피날레 등 이후의 작곡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 무렵 하이든(Joseph Haydn)을 만나 서로를 존경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하이든이 비엔나를 방문할 때면 두 사람은 종종 현악 4중주와 함께 즉흥 콘서트를 열기도 하였다. 1782년에서 1785년 사이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위해 여섯 편의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17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모차르트는 유럽 전역에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 명성을 얻는다. 수많은 궁정에서 초청 공연을 했고 그는 어디서나 천재 음악가로 환대를 받는다. 그와 아내의 생활은 수입에 비해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그로 인해 모차르트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유럽의 귀족들과 동일시했다. 자신은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이러한 자부심에 맞는 생활을 위해서는 궁정의 악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오스트리아 궁정은 이태리의 작곡가들을 선호했고, 특히 궁정작곡가였던 살리에리의 견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관한 근거 없는 전설이 만들어진다. 특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20세기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 1926-2016)의 희곡 ‘아마데우스’에 의해 대중의 인식 속에 깊게 자리하게 된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으며 한 때 목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칸타타를 함께 작업하기도 하였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모차르트가 베네치아의 작곡가이자 극작가였던 로렌조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를 만난 것은 1785년 끝 무렵이었다, 모차르트는 폰테의 대본으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만들고 1786년 비엔나에서 성공적으로 초연하였다. 이후 또다시 폰테가 대본을 쓴 ‘돈 지오바니’(Don Giovanni)를 작곡해 1787년 프라하에서 열렬한 반응 속에 공연하였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사악한 귀족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그려냄으로써 은연중에 사회적 긴장감을 표출하였다. 1787년 요제프 2세는 고인이 된 궁정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의 후임으로 모차르트를 자신의 실내악단장으로 임명한다. 어려운 재정 상태에서 벗어난 모차르트는 폰테가 완성한 세 번째 대본을 받아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 여자는 다 그래)를 작곡한다. 1790년 1월에 비엔나의 궁정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아 모차르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는 모차르트에게 특별히 가슴 아픈 한 해이기도 했다. 후원자였던 요제프 2세가 세상을 뜨고 영혼의 파트너였던 폰테마저 오스트리아를 떠난다. 모든 후원이 끊긴 모차르트는 다시 재정적인 궁핍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9월 ’마술 피리‘가 모차르트의 지휘와 작가였던 쉬카네더(Johann Joseph Schikaneder, 1751~1812)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어 100회 이상 계속되면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들 중 가장 큰 흥행을 이룬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고 두 달도 채 안 되어 모차르트는 일과 스트레스로 병석에 누웠고, 그 해 12월 5일 서른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잘츠부르크에 있는 그의 생가와 거주하던 아파트는 박물관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완성한 비엔나의 집은 기념관으로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는 자신과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결코 잊지 않았다. 곤궁함에 있을 때나, 권력의 억압 아래 있을 때조차도 그는 자신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는 음악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위대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었다.


“나는 누구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 자신의 감정을 따를 뿐이다.”

“I pay no attention whatever to anybody's praise or blame. I simply follow my own feeling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드바르트 뭉크, 영혼의 절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