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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11. 2020

출판사와 브런치

젊은 작가들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오래전 한 대학에서 강사로 영어를 가르치던 무렵이었습니다. 열정에 가득했고 참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죠. 그때의 저는 젊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모자란 부분이 많았죠. 친구의 소개로 한 출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양복 윗주머니에 행커치프를 꼽고 있던 출판사 사장은 어느 모로 보아도 멋쟁이였습니다. 그와의 인연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우린 젊음의 치기와 자유분방함으로 일주일에 몇 번씩 어울렸고, 그렇게 친구처럼 의기투합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저는 그 출판사 이름으로 여러 권의 영어책을 출판했고, 우린 출판가와 저자의 관계를 넘어 함께 세월을 공유했습니다.     


칠팔 년 전 그는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인문학과 관련된 책을 내면 어떻겠느냐고요. 수 십 년간 어학 교재만 내던 그가 몇몇 대학 교수들과 인문 교양 분야에 관심을 갖고 책을 내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마침 나도 근무하던 대학에서의 오랜 보직 생활을 마치고 시간이 나던 때라 그동안 생각했던 인문학적 주제들로 ‘생각거리 36’이란 책을 집필했고 출판했습니다. 이어 내 전공분야이기도 했던 ‘셰익스피어 인문학’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이전에 몇몇 인문학 관련 외국서적을 번역하여 출판하기는 했으나 그 분야로 직접 글을 쓰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죠. 오랜 인연을 이어왔던 출판사에서 그동안 강단에서 가르치며 가슴속에 품었던 생각들이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T. S. 엘리엇이란 영국 시인에 관한 글을 준비하다가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에도 그의 책을 출판했던 ‘파버 앤 파버’라는 출판사에 책상을 얻어 글쓰기를 이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생각은 교수직을 마감하면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내 마음속의 출판사는 그곳이었죠. 최근 몇 년 간은 나 역시 번잡한 일상을 보내느라 아주 가끔씩 그 출판사 사장을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래된 친구들이 그렇듯이 한참 만에 만나도 시간의 간격을 느끼지 못한 채 이야기를 즐기고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 출판사는 한때 잘 나갔었죠. 방송사나 대학들과 연계해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직원들의 숫자가 늘었고, 사무실도 커졌습니다. 멋쟁이 사장은 이제 사업가의 포스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성격이 좀 까칠했어요. 내게는 많이 접어준 편이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출판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분명해 저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죠. 물론 나와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얼굴을 붉힌 적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결국 둘 중 누군가가 맘을 풀어 지금까지 아슬아슬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 지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내 이름으로 그곳에서 출판한 탓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나의 얼마 안 되는 지식, 가벼운 감상, 우울한 무기력을 맡겨둔 곳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나의 원고가 숨 쉬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언제나 거기에 있으리라는 생각, 나를 위해 언제나 기꺼이 이름을 빌려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것들이 그곳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겪어온 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기적이었죠. 마치 가족처럼, 친구처럼,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산 것이지요.     


그 출판사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이책 출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 환경이 변하고 독자들의 기호와 경향도 변하고 있습니다. e-북이 보편화되었고, 읽을거리가 인터넷 상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까지 겹쳐 출판계가 엄청난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표지도 꾸며보고, 편집도 좀 더 보기 좋게 바꾸고, 주제의 선정에도 신중을 기해보았지만 웬만해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가 쉽지 않아 진 겁니다. 그렇게 정겨운 이름의 출판사들이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그와 통화했습니다. 예전의 목소리보다 조금은 힘이 빠진 것 같습니다. 하긴 나이도 꽤(?) 들었으니 여전히 목소리가 커도 꼴 보기 싫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라도 조금 목소리를 높여 보았습니다. 더 힘을 내자고 말입니다. ‘종합 출판’이 그 출판사의 이름입니다. 그곳은 내게 고향 같은 곳입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푸근하고 다정한 곳이죠. 아직도 몇 권의 책은 꾸준히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지만 이 어려운 시대를 지내기가 여전히 힘겨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믿습니다. 지난 30여 년을 보아왔던 출판에 대한 그의 열정을 믿습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고 이곳에 머물면서 충족되지 못한 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키고 있으니 저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렇게 ‘종합 출판’과 ‘브런치’는 내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글을 남기는 많은 젊은 작가들 역시 제본된 자신만의 책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의 ‘종합 출판’이 얼른 기운을 차려 오래전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글 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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