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Dec 19. 2020

'나는-아니에요' 증상

책임 전가의 시대

Most of man's misfortunes are occasioned by man. -Plinly the Elder

인간의 불행은 대부분 인간에 의해 일어난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괴롭고 힘든 상황 속에 빠져 있을 때, 다른 무엇을 비난하고, 탓하는 것은 인간의 흔한 속성이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그나마 완화할 가장 적절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난의 대상은 명료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슬픔이나 상실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의 이유를 불문하고 나 아닌 무언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이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나는-아냐 증상"(Not-me Syndrome)을 겪고 있다. 환경 탓이야..., 술 때문에..., 그놈이..., 사회가...  그래서 '테스 형'을 찾는 노래가 유행한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돌이켜 보면 우리는 참 많이도 세월 탓을 하고 살아온 것 같다. 50년 대는 전쟁 탓, 60년 대는 가난 탓, 70, 80년 대는 산업화와 독재 탓, 90년 대는 경제 탓, 새로운 세기에는 기후 탓, 쓰레기 탓, 정치 탓, 이젠 코로나 탓... 그 많은 구실이 우리의 위안이 되었고,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만 없었으면 우린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왜 이리 힘든 세월만 살고 있는 것일까?  부자 나라들의 모임인 OECD에도 가입하고, 유럽의 선진국들을 앞서서 무역 강대국이 되고, 반도체와 , IT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고, 가난한 나라를 돕는 나라가 되었음에도 왜 우린 여전히 세월을 탓할까.


'메아 컬파'(Mea Culpa), '내 탓이요'를 외치며 가슴을 치면서도 우린 비난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잘못을 가려줄 구실과 변명을 만들기에 바쁘다. 그것이 인간인가 보다. 19세기 미국에서는 포커를 할 때 카드를 돌릴 차례가 된 사람(dealer) 앞에 '엽총의 탄알'(buckstone)을 놓았는데 이를 'buck'이라고 줄여 불렀다. 여기서 유래한 영어 표현이 'pass the buck'이다. 자신의 차례를 넘겨 버린다는 뜻으로 '책임을 전가하다'라는 의미의 관용구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집무실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좌우명을 걸어두었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오늘날 구어체로 '일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 되었던 트루먼은 한국전쟁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북한의 기습공격에 대한 그의 반응은 단호했다.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으로 참전한 미군은 3년 간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 등을 포함해 모두 1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만은 전쟁의 끝 무렵에 전쟁에 개입했던 중국군에 대한 선제 공격을 주장했던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다. 한국전쟁이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으나 승기를 잡았던 연합군과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결정이 휴전과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외국 대통령의 선택에 맡긴 우리의 책임 회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임 전가의 사회적 병리현상과 관련해 학자들은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를 거론하기도 한다. 가난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고 결국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통해 근원적인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본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자본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로 이전해 간다는 생각이었다. 새삼 그의 복잡한 역사이론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개인들이 겪는 가난과 착취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과는 관계없이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 경우에도 문제아의 행동을 성적 충동의 억제, 부모의 억압 등 초기 유아기에서의 경험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소위 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심연은 환경과 양육이라는 제3의 원인만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이론들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시각을 제시하고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대한 임상적 처방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론이 개인이 겪는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이 개인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적 현상의 결과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습관적 행태에 어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의 나태와 판단 상의 오류, 엇나간 삶의 태도와 내적, 외적 결함 들마저도 사회에, 타인에게 돌리는 것은 왜곡된 시각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오네스코 '의자'

그러나 오늘날의 책임 전가 현상의 기저에는 관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회피한다.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우리는 마주치는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게 되고,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스스로 찾지 못하게 되면 그 분노와 좌절감을 남에게 돌린다. 우리는 생각이 다른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의 한 마디에 발끈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조롱의 작가'라고 불린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희곡작가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의 희곡 '의자'(Chairs)에는 외딴섬에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는 노부부가 등장한다. 어느 날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온 세상에 전달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부부는 손님들을 초청한다. 심지어 그 명단에는 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부부는 초대자들을 위해 무대 위에 의자들을 옮긴다.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의자들만 쌓인다. 나중엔 아예 부부가 서 있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던 중 누군가 등장한다. 바로 부부의 이야기를 청중에게 전달해줄 변사이다. 부부는 변사에게 자신들의 성명서를 전달한다. 그리고 할 일을 다 한 듯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변사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한마디도 못하고 빈 의자들만 가득한 무대에서 퇴장하는 변사의 뒤로 웅성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단절의 연극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할 말은 많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 자신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웅얼거림. 그것이 오늘의 우리를 타인과 단절시키고 우리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을 향해 비난의 함성만을 질러댈 뿐이다. 작품 속의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75년이나 같이 살았지만 매일 저녁, 심지어 가장 좋았던 저녁에도 당신은 내게 같은 말만 하게 하고, 같은 사람들, 같은 시간... 언제나 똑같은 것들을... 흉내 내게 했지. 이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고."                 


이제 우리도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들에게 책임을 넘기는 똑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나의 책임을 인정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내 탓이요'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전쟁과 역병 그리고 그 모든 시련은 나 아닌 남의 탓일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함께 이겨내야 할 공동의 도전임을 깨달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병, 전쟁과 폭풍의 은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