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Jan 06. 2021

죽은 아이를 애도하기를 거부함

딜런 토마스,  런던에서 불에 타 죽은 아이를 애도하기를 거부함

런던에서 불에 타 죽은 아이를 애도하기를 거부함

                                        딜런 토마스     


사람을 만들고

새 짐승 꽃을 키우며

모든 것을 이기는 어둠이

깨어지는 마지막 빛과

고요한 시간이

마구(馬具)를 단채 구르듯 바다에서 나왔다고

침묵으로 말할 때까지는    


그리고 나 또다시 둥근

물방울의 시온 산으로

밀 알갱이의 예배당으로 들어가야만 할 때까지는, 결코

그림자 같은 미미한 소리로 기도하거나

내 눈물의 소금 씨앗을

베옷의 작은 주름에 뿌려    


아이의 장엄히 타오르는 죽음을 애도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의 

순수와 젊음의 슬픈 노래로 

무덤처럼 엄중한 진실과 함께 떠나는 그녀와 같은 인간을 

죽이지 않으리라

그 성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모독하지 않으리라.    


처음 죽은 자들과 더불어 런던의 딸은,

오랜 친구들과

태고의 곡식 알갱이들, 그리고 어머니 대지의 검은 핏줄들에 싸여.

흐르는 템스 강 

무정한 물가에 은밀하고 깊숙이 누워있다. 

첫 번째 죽음 뒤에 다른 죽음은 없다.    


A Refusal to Mourn the Death, by Fire, of a Child in London

                                   by Dylan Thomas - 1914-1953    


Never until the mankind making

Bird beast and flower

Fathering and all humbling darkness

Tells with silence the last light breaking

And the still hour

Is come of the sea tumbling in harness    


And I must enter again the round

Zion of the water bead

And the synagogue of the ear of corn

Shall I let pray the shadow of a sound

Or sow my salt seed

In the least valley of sackcloth to mourn    


The majesty and burning of the child's death.

I shall not murder

The mankind of her going with a grave truth

Nor blaspheme down the stations of the breath

With any further

Elegy of innocence and youth.     


Deep with the first dead lies London's daughter,

Robed in the long friends,

The grains beyond age, the dark veins of her mother,

Secret by the unmourning water

Of the riding Thames.

After the first death, there is no other.        


오늘 뉴스를 보며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의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시의 제목은 길고 서술적입니다. ‘런던에서 불에 타 죽은 아이를 애도하기를 거부함’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에 발표된 이 시는 전쟁 중 나치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한 여자 아이의 죽음에 관한 시였습니다. 시인은 그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시적 아이러니의 표현이지요. 딜런 토마스는 그 죽음을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역사의 비극으로 승화시키고자 합니다. 시의 첫 연에서는 ‘암흑’이라는 표현을 통해 영겁의 세월을 거친 세상의 종말을, 둘째 연에서는 시인 자신의 죽음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세상과 인간 존재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진부하고 미약한 소리로 기도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한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애도는 아이의 죽음이 갖는 엄중한 진실을 오히려 가리고 말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것은 아이가 짊어지고 간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인류의 오만으로 빚어진 전쟁의 비극을 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어찌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허위와 오류와 죄악을 대신한 희생, 그것을 예수가 치른 십자가의 희생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모두가 답답하고 황망한 요즘입니다.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대상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죠. 하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는 한 아이의 죽음을 접하고는 아연함을 넘어 깊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두 살배기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전쟁 같은 현실 속에서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도 하지 못할 잔인하고 가증할 행동을 어찌 자식에게 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거면 왜 입양했느냐고 소리 지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뉘우쳐야 할, 너무도 비정상적인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성과 부성의 소멸을 역사적, 문학적인 시각에서 왈가불가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력하고 무방비한 가냘픈 어린 생명에 대해 가해진 폭력에 그저 몸이 떨려올 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미안하다’는 감성적인 표현도 결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은 전쟁이나 역병보다 더 엄중하고 두려운 인간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런 사회에 무슨 희망과 미래가 있겠습니까? 이 어린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약한 기도와 눈물과 탄식으로는 이 거대한 죄악을 결코 씻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판사와 브런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