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 4월은 잔인한 달

38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노 시인과 아내 그리고 뮤지컬 '캣츠'

by 최용훈

T.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은 188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190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3년 만에 학부과정을 마치고 다음 해에 석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그와 하버드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창생들 중에는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도 있었다. 리프만은 미국의 유명한 정치평론가로 ‘냉전’(Cold War)의 개념을 처음 도입하고 ‘stereotype'(전형)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엘리엇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1927년에는 아예 영국으로 귀화한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그를 미국 문학계의 대표적 인물들 중의 하나로 인정하여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였지만 그는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학창 시절부터 영국을 동경했다. 그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했던 초기 영국 이주민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기질적으로도 영국적 전통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버드 대학 동창생들에 따르면 그는 격식을 차리면서도 의도적으로 다소 흐트러진 영국 신사들의 차림새를 하고 다녔고, 파이프 담배를 즐겼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내성적이었고, 차분한 성품이었으며 늘 조용하고 소박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1930년대 하버드대학에 초빙되어 6개월 간 머무를 때는, 학부 기숙사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자신이 손수 끓인 차를 학생들에게 대접하곤 했다. 야위고 긴 손가락으로 은제 티 포트에 담긴 차를 따르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그와의 대화에는 언제나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의자에, 바닥에, 그리고 창틀에 걸터앉아 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엘리엇의 대표적인 시 ‘황무지’(The Waste Land)는 이렇게 시작된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어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죽은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이 따뜻했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하찮은 생명을 먹인다.

그는 왜 4월을 잔인하다고 했을까? 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시작이다. 하지만 시인은 겨울이 더 따뜻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구절은 20세기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졌지만, 인간성은 상실되고 욕망만이 들끓어 고요한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현대의 문명보다는 차라리 가난했지만 따뜻한 인간성을 지녔고, 무지했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감춰주었고, 어렵고 하찮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베풀었던 그 옛날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흔히 엘리엇의 시는 1차 대전 후의 회의와 절망의 의식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잿빛 우울함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1925년 쓴 그의 시 ‘텅 빈 사람들’(Hollow Men)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텅 빈 사람들

우리는 박제된 사람들

서로 기대어 서있으며

지푸라기로 채워진 머리. 아아, 가엾어라!

.....................................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굉음을 내면 서가 아니라 흐느끼며.

얼마나 허망한가! 엘리엇은 분명 새로운 세기에 겪는 인간의 고통, 문명의 위기를 비탄 속에서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한 것은 아닐까? 그 잔인한 4월에 지난겨울을 추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1948년 엘리엇은 노벨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늘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고, 평생 동안 관계를 맺어온 출판사 파버 앤 파버(Faber & Faber)에 사무실을 얻어 편지와 원고를 쓰곤 했다. 노벨상을 받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출판사의 직원 같은 모습이었다. 180cm가 넘는 장신이었지만 그는 늘 꾸부정했다. 런던의 사업가 같은 양복 차림이었지만 화려함이나 독특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특별한 후광도 없었다. 술집이나 카페에도 거의 가지 않았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안락한 사무실을 원하지도 않았다. 종종 독자들 앞에서 그의 시를 조용히 낭송하곤 했는데, 그의 대표작인 ‘황무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격정적으로 낱말들을 토해냄으로써 청중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엘리엇은 1915년 비비엔 헤이우드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아내의 비정상적이고 불안한 심리 상태로 불행을 겪었고,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러던 그에게 말년의 반려이자 엘리엇 문학의 수호자인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발레리 플레처였다. 10대의 소녀 시절부터 엘리엇의 팬이었던 그녀는 그가 일하던 출판사에 입사해 그의 개인 비서가 된다. 이 위대한 노 시인을 곁에서 돕던 그녀는 마침내 1957년 그와 결혼한다. 엘리엇의 나이는 68세였고 그녀는 고작 서른의 나이였다. 두 사람은 38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가끔 극장에 가고, 집에서는 낱말 맞추기 게임을 하면서 그들은 엘리엇이 1965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얼마나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을 원하였는지 알고 있었고 그에게 그것을 얻게 해 주었다.

70세가 되던 해 엘리엇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막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시작했소. 지난 몇 년간, 내가 60세 남짓까지 해왔던 모든 일은 아주 유치하게 보였어요.” 나이 칠십에 위대한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였던 엘리엇은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들이 유치한 것이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우리네 삶이 그런 것 같다. 새삼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 인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위한 시간을 그다지 많이 남겨주지 않는 것이다.

사생활에 대해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엘리엇은 자신이 죽은 뒤 전기 작가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무분별하게 파헤쳐지고 이야기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런 남편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발레리 엘리엇은 남편의 작품들, 그의 서신들과 유고들을 철저히 보호하였다. 그녀는 ‘황무지’ 원본의 영인본을 직접 출간하였으며, 남편의 시에 대한 에즈라 파운드의 주석을 편집하였고, 남편의 서신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내고자 하였다. 수많은 출판업자와 학자들의 간청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의 글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이러한 완고함과는 달리 그녀는 어린아이를 위한 남편의 동시 하나를 뮤지컬로 각색하는데 동의한다. 1939년에 발표된 ‘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15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서 본 인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등장하는 고양이 하나하나가 인간의 한 유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을 대변하는 고양이들의 다양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주머니쥐’(Possum)라는 표현은 파버 앤 파버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였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엘리엇에게 지어준 별명이었다.

엘리엇의 이 시가 작곡가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에 의해 ‘캣츠’(Cats)라는 뮤지컬로 탄생한 것은 1981년이었다.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상연된 이 뮤지컬은 이듬해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뮤지컬이 되었다. 이로 인해 엘리엇의 가족들은 공연 판권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고, 발레리 엘리엇은 그 수익을 사용해 공모전을 열거나, 가난한 시인들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엘리엇의 명성과 작품을 지켜내고, 그의 이름으로 작가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던 그의 아내는 2012년 11월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위대한 시인이자 남편이었던 엘리엇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녀는 엘리엇이 그리워했던 그 겨울의 초입에 그의 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의 절망과 좌절조차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려 했을 것이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고양이 그리자벨라의 다음 대사는 남편 엘리엇을 만나러 가는 그녀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지 모른다. ‘캣츠’의 주제곡으로 알려진 ‘기억’(Memory)이란 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어루만져 주세요!

햇빛 아래 좋았던 날들

그 추억을 간직한 채

홀로 남겨지기는 쉬운 일이죠.

날 어루만지면

당신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예요.

보세요! 새로운 날이 시작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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