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 낭만과 방황 사이

실컷 사랑하고, 마음껏 즐겼다.

by 최용훈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 그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를 시작으로, 윌리엄 워즈워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퍼시 비시 셸리, 존 키츠와 더불어 바이런은 19세기 전반 영국의 낭만주의 시대를 구가하였다. 낭만주의의 키워드는 ‘자유’와 ‘저항’이다. 고전적 규칙과 규범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감정, 제도와 관습의 억눌림에서 벗어난 자연으로의 회귀, 그리고 그 자유를 얻기 위한 저항의 표현이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의 태동이 시민의 자유를 위해 분출되었던 프랑스혁명과 시점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바이런의 삶은 바퀴가 빠져나간 마차처럼 제멋대로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귀족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나 다리를 저는 불구라는 콤플렉스가 타협을 모르는 불같은 성품과 어우러져 그는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매드 잭’(Mad Jack)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의 부친의 성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이런의 아버지는 유산을 노리고 유부녀인 후작부인을 유혹해 이혼을 시킨 뒤 결혼하였고, 결혼 후 학대받던 그의 첫 부인은 두 딸을 남긴 채 애환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는 첫 부인과의 결혼과 같은 이유로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가이트 영지의 상속녀인 캐서린 고든과 결혼한다. 바이런은 바로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다. 바이런의 부친은 영원히 타락한 영혼이었다. 그의 방탕한 생활을 위해 바이런의 어머니는 물려받은 영지와 작위마저 팔아야 했고, 평생을 우울증과 궁핍 속에서 살아야 했다.

바이런은 그의 큰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10세 때에 로치데일의 6대 남작이 된다. 그가 ‘바이런 공’(Lord Byron)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영국에서는 귀족을 가리켜 ‘푸른 피’(blue blood)라 부른다. 삶의 방식이나 성품과는 무관하게 그는 귀족이라는 이유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문학과 역사를 공부한다. 태생적으로 영민했던 그였지만 학업보다는 승마와 복싱, 도박으로 나날을 보냈고, 특히 자유분방한 성적 행동들로 인해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가문의 재정이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어린 나이에 이미 상당한 부채를 지게 된다. 케임브리지를 나온 후 바이런은 1809년에서 1811년까지 3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지를 여행한다. 이 여행은 이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바이런의 이해를 넓혀주는 것과 더불어 채권자들로부터의 자유도 안겨준다. 그리고 긴 여정 가운데 그는 여전히 자유분방한 여성편력을 계속한다.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

돌려주오, 오, 내 마음 돌려주오.

아니 기왕에 내 마음 떠난 바엔

이젠 그걸 가지고 나머지도 가져가오.

나 떠나기 전 내 언약 들어주오.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런던으로 돌아온 바이런은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1812) 1부와 2부를 출간하여 일약 문단의 기린아로 등장한다. 어린 시절부터의 문학적 재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사교계의 별이 되었고, 모든 곳으로부터 초대되는 유명인사가 된다. 이후 1816년까지 다섯 해에 걸쳐 바이런의 삶은 방탕과 자유분방함의 극치를 이룬다. 수많은 여인들과의 애정행각, 그리고 이복 여동생과의 근친상간 추문, 늘어나는 부채 속에서도 이 시기에 바이런은 그의 대표적인 시들을 써낸다. ‘불신자’(The Giaour)와 ‘아비도스의 신부’(The Bride of Abydos, 1813), ’파리시나‘(Parisina)와 ’코린스 포위전‘(The Siege of Corinth, 1815), 시집 ’히브리 노래들‘(Hebrew Melodies, 1814~1815)이 모두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여배우들과의 스캔들, 이복 여동생과의 추문, 늘어가는 빚으로 그의 평판은 계속 추락하고 만다. 결국 그는 그 침몰의 나락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결혼을 생각한다. 방탕했던 부친의 기억이 재현되는 것일까? 바이런은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것으로 여겨지던 애너벨러라는 여성과 1815년 결혼하고, 같은 해 12월 딸 에이다를 얻는다. 하지만 근친상간이라는 추문의 그림자와 방탕한 여성편력은 결혼 후에도 이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 1년 만에 별거에 들어간다. 그리고 1816년 4월 그는 영국을 떠난다. 그리고 살아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토록 늦은 한밤중에

지금도 사랑은 가슴속에 깃들고

지금도 달빛은 훤하지만.

칼을 쓰면 칼집이 해어지고

정신을 쓰면 가슴이 헐고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도 때로는 쉬어야 하니.

밤은 사랑을 위해 있고

낮은 너무 빨리 돌아오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


1816년 4월 바이런은 고국을 떠난다.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을까? 여덟 해의 타국 생활 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화려했던 사교계, 사랑했던 여인들. 그가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스위스 제네바에서 바이런은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이후 그의 아내가 된,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를 만난다. 그리고 영국에서 관계를 맺었던 메리의 이복동생 클레어몬트와 재회한다. 그녀는 그해 여름 셸리 부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바이런의 딸을 출산한다.


1816년 10월 바이런은 이태리를 향한 항해에 오른다. 그 여행 중에도 그는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계속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작 ‘돈 주앙’을 집필한다. 17편의 칸토로 구성된 이 시는, 존 밀턴의 ‘실낙원’ 이후 영국에서 출간된 가장 중요한 장시로 평가받는다. ‘돈 주앙’은 ‘차일드 해럴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지에 넘치고 풍자적인 변화를 추구하였고 바이런의 또 다른 성격을 드러내는 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1818년, 서른의 나이가 된 그는 19세의 결혼한 백작부인 테레사 귀치올리를 만난다. 두 사람은 사랑의 정염에 휩싸이고 결국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바이런의 곁에 남는다.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영혼과 방랑의 기질은 그를 한 곳에 잡아두지 못했다. 1823년 바이런은 그리스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토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한다. 그는 사비를 들여 그리스의 함대를 재정비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실제로 전투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824년 병을 얻게 된 바이런은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인해, 세균에 감염된다. 그리고 그해 4월,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8년 전 그가 영국을 떠났던 때도 4월이었다. 평생 자유를 구가하고 사랑에 취해 살던 그의 죽음은 참으로 허망했다. 영국인들은 이 위대한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리스인들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그의 시신은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타락한 그의 삶을 비난하는 사제들의 반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수 없었다. 결국 바이런은 뉴스테드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고, 한 세기 반의 세월이 흐른 1969년 그의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진다.

짧은 삶이었다. 하긴 낭만주의 시인의 삶으로는 짧지 않은 삶이기도 했다. 극단적 이상주의자로 불렸던 셸리는 서른에, 그리고 키츠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말이다. 그는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그의 곁에는 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실컷 사랑하고 마음껏 즐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가 진정 원했던 삶은 그가 살아온 삶과는 다른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차일드 해롤드’의 시 속에 그의 본심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치 않는 곳

깊은 바다 곁, 그 함성의 음악에 사귐이 있다.

난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

이러한 우리의 만남을 통해

현재나 과거의 나로부터 물러나

우주와 뒤섞이며, 표현할 수는 없으나

온전히 숨길 수 없는 바를 느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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