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원하는 것을 얻는 비극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45-1900)는 19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는 아일랜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희곡과 소설뿐 아니라 시, 동화, 단편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대학시절 그는 시인으로 문단에 등장한다. 이후 강연을 다니면서 작품을 썼는데 그의 희곡과 동화들은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글은 촌철살인의 기지와 해학을 특징으로 하여 수많은 경구를 담고 있었다. 그의 작품 속에 사용된 경구, 명언 등을 가리키는 ‘오스카리아나’(Oscariana)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은 그의 표현들이 얼마나 자주 인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
“젊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웃을 줄 안다. 그게 젊음이 가진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이다.”
“마흔 살은 젊음의 노년이고, 쉰 살은 노년의 젊음이다.”
“대중성은 세상이 보잘것없는 예술에 씌우는 월계관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태하기로 유명했으나 고전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로서 평판을 얻은 뒤, 그는 1882년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희곡을 써 뉴욕에서 상연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적 희곡들은 모두 17세기 후반 프랑스와 영국에서 번창했던 ‘풍습 희극’(comedy of manners)의 전통을 따르는 것들이었다. 풍습 희극은 당시의 위선적인 사회적 풍습과 다양한 계층의 가식적인 행태를 풍자하는 재치에 넘치는 희극이었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은 그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풍자하고 조롱했던 것들이 결국 그의 삶에 대한 비난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쉽게 사랑에 빠졌고, ‘달의 여신’이라 찬양했던 한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그의 기질은 평범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도 자유로웠다. 결혼생활의 권태와 아내와의 불화로 와일드는 점차 가정과 멀어졌다. 더구나 그는 동성애자였다. 미소년들이 많은 술집을 찾아다니며 은밀하게 하룻밤 상대를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41세가 된 1895년 그는 갑작스럽게 송사에 휘몰린다. 동성애자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의 대학 시절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옥스퍼드에 다닐 때만 해도 엄격한 이성애 주의자였다고 한다. 사실 그의 여성 편력을 아는 사람들은 와일드의 동성애에 대해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화려하고 독특한 옷차림과 기행으로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졌을 뿐이었다.
“결혼은 너무 무거운 짐이어서 때론 세 사람이 필요하다.” 그의 이러한 경구 때문이었을까? 와일드의 결혼 생활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든다. 사건은 옥스퍼드 대학 동창인 동성애자 알프레드 더글러스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평범한 일상에 무료해하던 와일드는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파격을 즐기는 그의 기질이 작동한 것이었을까? 결혼 후 찾아온 뜨거운 사랑의 대상은 남자였다. 문제는 알프레드가 와일드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데 있었다. 결국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 알프레드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와일드가 다니던 클럽에 ‘남색 오스카 와일드’라는 쪽지를 붙여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였다. 격분한 와일드는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이것은 결론적으로 큰 실책으로 드러났다. 사실 와일드의 친구들은 그에게 당장 고소를 취하하고 영국을 떠나 있으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와일드가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한 것은 알프레드 때문이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던 그가 와일드를 부추겨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와일드는 자신이 부자간의 감정대립에 끼어들게 된 것을 깨달았지만 그의 자존심이 도망치듯 영국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감성적인 그는 알프레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소에 따른 반대심문에서 오히려 와일드의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는 체포된다. 그리고 재판에 넘겨져 2년간의 중노동형에 처해진다. 그저 스캔들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영국과 유럽 전체를 들썩이게 한 큰 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일은 동성애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와일드는 영국에서 영구 추방되었고, 그는 프랑스로 이주했다. 알프레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결국 사랑을 잃고 두 아들조차 만날 수 없게 된 와일드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고, 건강을 해쳐 1900년, 55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이 있다. 늙음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그 아름다움과 젊음에 반한 도리언은 초상화 속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어느 순간 자신을 대신해 초상화가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현실 속의 자신은 늘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젊음을 얻은 그는 타락과 방종의 삶을 산다. 그리고 그가 죄를 저지를수록 초상화 속의 그는 추하고 사악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침내 도리언은 그림 속의 자신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그 순간 초상화 속의 그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자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심장에 칼이 꽂힌 채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현실 속의 늙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시간이 초래하는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렇게 늙음은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늙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와일드는 영원한 젊음을 꿈꿨는지 모른다. 작품 속의 도리언처럼 현실 속에 늙어가는 자신을 보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얻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비극.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비극.” 와일드는 그가 원한 자유롭고 드라마틱한 삶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은 그의 삶은 비극이었다.
“인간의 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다.” 와일드의 내부에도 그랬다. 그의 희곡 ‘살로메’에서 보여주는 잔인함, 도리언 그레이의 어리석음 등 인간의 왜곡된 본성을 그려내면서도 그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행복한 왕자’ 속의 따뜻한 인간애를 함께 그려낸 작가였다. ‘마을 광장의 높은 탑 위에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서있다.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던 왕자는 죽은 후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서면서 비로소 세상에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지 알고 눈물을 흘린다. 한편 갈대를 사랑하게 되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제비 한 마리가 우연히 행복한 왕자를 만난다. 그리고 왕자를 위해 기꺼이 그의 곁에 머물기로 한다.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해 아픈 아이가 있는 가난한 재단사, 어머니가 병들어 슬퍼하는 소년, 성냥팔이, 불쌍한 할아버지,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 등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몸에 장식된 금과 보석, 심지어는 사파이어로 만든 자신의 눈까지 떼어내서 나누어준다. 마침내 볼품이 없어진 왕자의 동상은 철거되고, 남쪽으로 가지 못한 제비는 끝까지 왕자의 곁을 지키다가 결국 겨울의 추위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철거된 왕자의 동상은 불길 속에서 던져졌지만 그의 심장만은 녹지 않아 죽은 제비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 빛나던 동상은 오스카 와일드가 꿈꾸던 그의 초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해서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동성애로 인한 전력 때문에 이 천재 작가를 위한 변변한 기념비 하나 세워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난 1998년 그는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다. 도심 한 복판에 그의 흉상이 세워지고 그는 마침내 행복한 왕자가 된다.
“그렇다. 나는 꿈꾸는 자이다.
왜냐하면 꿈꾸는 자는 오직 달빛으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벌을 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먼저 새벽을 보기 때문이다. “
오스카 와일드는 문학 속에 많은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수많은 재담을 들려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왠지 공허하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흔히 유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움을 궁극의 목적으로 여기는 작가였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 불타오르는 그 색다른 욕망들은 시대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너무 일찍, 남들보다 먼저 새벽을 보려 했는지 모른다. 그는 슬픔에 빠진 행복한 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