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부부

엘리자베스 -"그대가 한 번 왔을 때, 그대는 영원히 가지 않았다."

by 최용훈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Elizabeth Barret Browning, 1806-1861)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1세 때에는 네 권으로 된 ‘마라톤 전쟁’이란 서사시를 발표한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 말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고 심지어 폐결핵으로 의심되는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평생 육체적 고통 속에 살았다. 그녀는 생전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누렸고,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기를 누려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영국에서는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과 계관시인의 명예를 다투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계속되는 질병의 고통 속에 고립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 여섯 살 연하의 한 젊은 시인이 편지를 보내온다. 1845년 1월 10일의 일이었다.

"배릿 양, 당신의 시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는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온 마음 다해 그 시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당신도 사랑합니다."

그 젊은 시인은 바로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대표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무명의 시인 지망생일 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무려 573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결혼 전까지 책 두 권에 달하는 시를 나누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마흔 살 노처녀이자 장애인이었던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혼을 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의 청혼을 번번이 거절하지만 그녀 역시 로버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늦은 5월의 봄, 로버트는 마침내 엘리자베스를 찾아간다. 그를 처음 본 순간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한 번 왔을 때, 그대는 영원히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이 딸의 건강을 구실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이태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브라우닝 부부는 아들을 얻고 15년 간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한다. 1861년 6월의 끝자락에 마침내 그녀는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남편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 그리고 언제까지나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소녀처럼 청순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내 뺨에 머리를 기댄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신혼 시절 엘리자베스가 남편의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는 다음의 시는 모든 부부에게 보내는 사랑의 헌시이다.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할까요? 말씀드리죠.

감정이 시야에서 벗어나 생의 목적과 은총의 극치를 찾을 때

내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그 깊이와 그 넓이와 그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

나의 놓쳐버린 성자들과 함께

잃어버린 것으로 보였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모든 삶의 숨결. 미소. 눈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죽은 후에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자기만의 세상에 침잠해 외로움에 떨고 있던 엘리자베스에게 로버트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은 얼마나 큰 위로이었을까? 육체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매 순간,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던 그 순간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남자. 그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고마움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위해서라면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버리겠다고 말한다. 그 처연한 사랑의 의지는 가볍게 사랑하고, 쉽게 변하는 오늘의 사랑을 얼마나 수치스럽게 하는지!

참으로 그러할까요?

이 자리에 누워 죽고 만다면,

내가 없으면 그대는 생의 기쁨을 잃을까요?

무덤의 습기가 내 머리를 적시면, 당신에게 햇볕이 더 차가울까요?

.................

나의 손이 떨리는 때라도

당신의 술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대여.

죽음의 꿈을 버리고 생의 낮은 경지를 다시 찾아올게요.

..................

나는 사랑을 위하여 무덤을 버릴 겁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고운 하늘을 그대 있는 이 땅과 바꿀 겁니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가? 죽음조차 거부하는 용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는 그 절절한 바람과 믿음. 이런 사랑을 원치 않는가? 오늘의 사랑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브라우닝 부부의 사랑이 결코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열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이의 차이, 장애, 아버지의 반대... 그 모든 것이 불타는 사랑의 열정으로 극복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내의 건강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모든 것을 버린 브라우닝의 사랑이 열정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오로지 한 남자만을 믿고 의지했던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이 사라진 결혼을 유지하는 힘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결코 쉽게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 사랑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 애초에 모자란 사랑을 한탄해야 하지 않을까? 로버트 브라우닝은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겼음에 틀림없다. 다음의 시에서 얘기하는 사랑할 시간은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을 그렇게 그녀만을 사랑할 시간으로 남겨두었다.

Save apart time to laugh.

It's the music of your soul.

Save apart time to love.

For your life is too short.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세요.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세요.

그것은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일상은 참으로 행복했다.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잠드는 그들의 시간. 그 속에서 시를 쓰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드러내던 그 아름다웠던 날들에 브라우닝은 한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브라우닝에게 그것은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였다. 그의 짧은 시 ‘피파의 노래’(Pipa's Song)에서처럼 종달새가 지저귀고, 움직인 듯 만 듯 소리 없이 앞을 향해 움직이는 달팽이의 여유로움, 그리고 축복 가득한 믿음의 세상, 그 모든 것은 사랑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일 년 중 봄

봄날 아침

아침 일곱 시

언덕 중턱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맺히고

종달새는 높이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를 기어간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온 세상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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