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 파리에 핀 ‘악의 꽃’

파리의 우울 속에 태어나, 살다, 묻히다

by 최용훈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무엇에고 그대 좋을대로.

다만 취하라.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가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 하리,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라! 술이든, 시든, 또는

덕이든, 무엇에고 그대 좋을대로."

(보들레르, ‘취하라’)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그렇게 그는 길지 않은 인생을 취해있었다. 외로움에 취하고, 미움에 취하고, 그리움에 취하고 방황과 방탕에 취해있었다. 그는 자신을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이 그를 찬양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언젠가는 위대한 예술가로 남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시집 ‘악의 꽃’이 추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받을 때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문학관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항상 문학과 예술이 도덕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적을 추구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알고 있으시죠. 내게는 구상과 스타일의 아름다움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나는 미덕과 단점을 지닌 이 책이 문학적 소양이 있는 독자들에게 빅토르 위고나 테오필 고티에 심지어 조지 고든 바이런의 명시들과 나란히 기억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상징주의는 낙관적이고 현실적인 사조와 사상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것은 19세기의 사회주의 사상, 과학에 대한 믿음, 실증주의에 대한 불만이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삶’(life as it is)을 표현한다는 사실주의의 환상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의 유미주의와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징주의는 유미주의가 추구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정신을 공유한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유미주의를 표방했던 ‘고답파’ 시인들의 맹주 테오필 고티에(Jules Pierre Théophile Gautier)에게 자신의 ‘악의 꽃’을 헌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파리에서 태어나 그의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60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다. 고아였던 어머니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보들레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어머니의 재혼, 엄격한 계부와의 관계, 어린 나이에 그에게 남겨진 상당한 유산의 관리를 둘러싼 갈등 등, 보들레르의 가정환경은 그의 기질과 생활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보들레르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집착 그리고 계부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계부에 대한 그의 감정은 이중적인 것이었다. 어머니를 놓고 계부에게 강한 적대감을 느끼면서도, 장군이었으며 대사직을 지내고 상원의원이 되었던 계부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일종의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기숙학교 시절, 성적이 떨어지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어린 보들레르는 외로움과 함께 무언가에 대한 분개심을 내면에 키워간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되고, 그것은 어머니에게 보낸 수많은 서신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평생 어머니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던 보들레르는 그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으로 이주한 뒤 1857년 그곳에서 사망한다.


보들레르는 초기 자본주의가 태동되던 대도시 파리에서 방황과 타락의 삶을 산다. 어린 시절 감염된 성병과 사치스러운 삶, 유산의 탕진과 늘어가는 빚. 그는 파리의 환희와 열정, 그 절망과 고독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의 운문 시 ‘악의 꽃’(Les Fleurs de Mal, 1857)과 산문 시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 1869)이 탄생한다.


1841년 보들레르의 계부는 방탕과 타락에 젖어 유산을 탕진하던 그를 인도로 보낸다. 그의 후기 시에 나타나는 바다, 항해, 이국적인 항구의 모습은 주로 이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인도에 까지 이르지 않는다. 중도에서 배에서 내린 그는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시기 그의 운명을 바꾼 듀발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창녀의 딸이었고, 아이티 계 흑백 혼혈이었던 그녀는 보들레르의 어머니의 표현대로 평생 그를 재정적, 정신적 탈진의 상태로 이끈다. 그녀와의 관계를 계부와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그는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1840년대 중반부터 보들레르는 자신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845년 그의 첫 예술평론은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그의 예술적 견해들은 대담하고 예언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1846년의 글에서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에게 강력한 찬사를 보냈는데, 이로써 그는 ‘낭만주의의 옹호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보들레르는 타고난 허약체질에다 성인이 된 후로는 늘 빚에 쪼들려 채권자들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런 이유로 무언가에 열중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들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보들레르는 포의 숭배자로 알려졌는데, 그가 쓴 추리소설의 분위기는 이후 보들레르의 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857년 보들레르는 그의 첫 시집 ‘악의 꽃’(Fleurs du mal)을 발표한다. 이로써 그에게 많지는 않으나 열렬한 독자층이 형성된다. 하지만 시에 표현된 ‘성과 죽음’의 주제들은 대중들 사이에 큰 물의를 일으킨다. 그의 시에는 레즈비언, 변태, 우울, 도시의 부패, 순수의 상실, 알코올 등 당시에 사회적 병폐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시를 출판했던 출판업자와 인쇄업자들은 공공의 도덕성을 해쳤다는 혐의로 기소되고, 시집에 포함된 여섯 편의 시가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타프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 등 당대의 문인들이 보들레르의 편에 서서 법원의 판결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오늘날 그의 시는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로, 현대시에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부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보들레르는 19세기의 대표적인 영국의 산문작가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의 ‘어떤 영국 아편중독자의 고백’을 번역하였고, ‘짧은 산문 시“와 플로베르, 고티에, 발작 등에 대한 비평문을 발표하였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낮과 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악의 꽃’에서 보여주었던 상징적 운문에 대한 재능만큼 산문으로 된 시에도 탁월했다. 1862년에 발표된 ‘파리의 우울’은 그의 파리에 대한 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산문시의 놀라운 시적 확장성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시의 형식에 대한 예언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파리의 우울’에 포함된 헌사에는 이런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 야심만만한 시절에,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 산문의 기적을 꿈꾸어보지 않았겠는가2?”


보들레르는 산문을 통해 시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의 우울’을 번역한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는 "산문으로 시를 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문적인 현실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여 기술한 것"이라고 말한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다. 그는 19세기의 타락하고 부패한 파리를 증오하고 또한 사랑했다. 그곳은 시의 세계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어둠은 상상의 세계를 넘어서고 있었고, 보들레르는 운문으로 보다는 산문의 쓰라림, 직접성이 파리를 더욱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본문의 첫머리에 인용한 ‘취하라’를 포함해 산문시 50편, 그리고 헌사, 운문으로 써진 에필로그로 구성된 ‘파리의 우울’은 취해버린 파리의 어두운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인 도시의 뒷골목을 그린 추상화이기도 하다. 특히 49편, ‘가난뱅이들을 때려눕히자!’에서 보들레르는 거지에게 베푸는 우리의 동정 혹은 무관심은 결국 그를 영원히 거지로 남게 할 뿐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를 두들겨 패서 거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하겠다는 도시의 우울한 헐벗음에 대한 그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말년의 보들레르는 만성 질병, 마약성 약물의 남용 등으로 고통을 받는다. 특히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평생을 따라다닌 고통스러운 그림자였다. 결국 그는 1864년 빚의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벨기에로 떠난다. 하지만 1866년 심장마비가 오면서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달은 브뤼셀과 파리에서 반신불수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867년 8월 31일 파리에서 숨지고 그곳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힌다. 그는 영원히 파리를 떠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로버트-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