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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7. 2020

베니스의 상인, 정의와 자비

셰익스피어 인문학: The Merchant of Venice

  베니스에 안토니오라는 상인이 있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진실한 친구였고, 성공한 상인이었다. 어느 날 바사니오라는 친구가 그에게 찾아온다. 안토니오와 오랜 우정을 이어오던 그는 사치와 낭비로 재산을 탕진하고 늘 안토니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벨몬트에 사는 포오셔라는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무일푼이었던 바사니오는 그녀에게 구애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안토니오에게 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안토니오는 가진 돈 전부를 투자해 외국에서 물건을 구입했고, 친구에게 빌려줄 돈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친구를 돕고 싶었던 안토니오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만난다. 그리고 돈을 빌려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 샤일록은 기독교인인 안토니오가 늘 자신을 경멸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어 자신의 사업을 방해했으므로 마음속 깊이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돈을 빌리러 온 안토니오에게 황당한 제안을 한다. “돈을 갚지 못하면 당신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든 한 파운드를 베어내겠소.”(샤일록, 1막 3장) 바사니오가 그런 조건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안토니오는 친구를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사실 물건을 실은 배가 도착하기만 하면 빌린 돈은 쉽게 갚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베니스의 상인’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우정’이 주요한 테마로 자주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낭만희극 ‘베로나의 두 신사’에 등장하는 프로테우스와 밸런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밸런타인은 학문의 길을 택하여 밀라노로 떠나고, 프로테우스는 줄리아란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있었기에 젊음의 미덕은 사랑이라고 믿으며 베로나에 남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로테우스도 줄리아와 가슴 아픈 이별을 고하고 밀라노로 향한다. 밸런타인을 다시 만난 프로테우스는 그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문에 열중하리라 믿었던 밸런타인이 밀라노 공작의 딸 실비아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역시 사랑은 젊은이들의 특권인가! 그런데 실비아를 보는 순간 프로테우스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베로나에 두고 온 줄리아는 완전히 잊은 채 그는 실비아를 향해 드러내 놓고 사랑을 고백한다. 냉담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지어 줄리아가 정표로 준 반지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그는 사랑에 빠져 밸런타인과의 우정을 버린다. 결국 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 밸런타인은 프로테우스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누구를 믿겠는가, 오른손이 자기 가슴에 위증을 하는데.

         프로테우스, 유감이지만 이제 더 이상은 자네를 믿을 수 없네. 

         자네 때문에 세상 전체를 불신하게 되었어.

         친구에게 입은 상처가 가장 깊은 법이지. 아 야속한 세월,

         모든 적들 가운데 친구가 가장 악한 적이라니!  (밸런타인, 5막 4장)    

  친구의 배신은 참으로 참기 어렵다. 우정을 잃은 사람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밸런타인도 세상 전체를 불신한다. 친구가 적이 되는 순간 누구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친구의 배신에 괴로워하면서도 밸런타인은 프로테우스와의 우정을 버리지 못한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 프로테우스를 위해 실비아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진정 우정을 위해 사랑마저도 포기할 수 있는가? 물론 셰익스피어는 다른 결론에 이른다. 밸런타인의 우정에 감격한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한다. 밸런타인과 실비아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두 쌍의 연인은 행복한 결합을 이룬다. 그렇게 우정, 사랑, 믿음이 회복되는 해피엔딩이다. ‘베로나의 두 신사’는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는 낭만희극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다. ‘우정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가?’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가?’     

  헬렌 켈러(Hellen Keller)는 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친구와 함께 어둠 속을 걷는 것이, 홀로 빛 속을 걷는 것보다 좋은 일이에요.” 너무나 멋진 말이 아닌가! 고난의 길이라도 옆에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친구는 그런 존재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손을 내미는 그런 존재 말이다. 친구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 세상, 그래서 효용성이 없어지면 언제든 냉정히 등을 돌리는 그런 세상에 진정한 우정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우정은 어둠 속을 함께 걷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카뮈(Albert Camus)는 친구를 이렇게 규정한다.    

        “내 뒤에 걷지 마세요. 내가 앞설 수 없으니까.

         내 앞에 걷지 마세요. 내가 다를 수 없으니까.

         그냥 내 옆에서 걸으세요.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세요. “    

  우정은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바사니오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그와 나란히 걷기 위해, 그와 어려움을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베니스의 상인’은 우정에 대한 연극이기도 하다. 바사니오에 대한 안토니오의 우정이 극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친구인 살레리오는 그들의 이별 장면을 이렇게 회상한다.     

        “바사니오와 안토니오의 작별 광경을 봤지. 바사니오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하니까 안토니오는 ‘조급히 굴지 말게.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안 돼. 때가 익을 때까지 느긋이 기다리게. 그리고 그 유태인에게 

         써준 증서가 연심으로 가득한 자네 마음에 부담되게 하지 말게. 

         명랑하게 굴라고. 청혼하는 데만 전념하란 말일세. 어떤 애정 표현이 

         가장 적절한가 하는 데만 마음을 쓰게.‘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자 얼굴을 돌리고는 손을 뒤로 

         내밀어서 바사니오의 손을 꽉 쥐는 것이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작별했지. “ 

                                                    (살레리오, 2막 8장)    

  


  그의 우정 덕이었을까? 바사니오는 포오셔의 애정을 얻게 된다. 수많은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포오셔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안토니오의 배가 해협을 지나다가 침몰하고, 안토니오는 샤일록의 고발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진 안토니오를 생각하며 바시나오는 절망 한다. 그리고 눈물로 포오셔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며 안토니오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다.         

        "바사니오, 내 배들은 모두 침몰됐네. 채권자들이 표독해져서 내 형편은 

         말이 아닐세. 유태인에게 준 차용증은 기한이 지났고, 내 목숨을 잃지 

         않고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을 것 같네. 따라서 우리 사이의 부채는 일절 

         없지만 그로 인해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 바라 건데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자넬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네. 우정에 끌려온다면 

         고맙지만, 안 와도 되고, 이 편지는 잊어버리게" (안토니오의 편지, 3막 2장)    

  상황을 알게 된 포오셔는 샤일록에게 진 빚의 몇 배를 들여서라도 안토니오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바사니오를 안토니오에게 보낸다. 한편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불행을 알게 되고는 기뻐한다. 그리고 기어이 그의 살 일 파운드를 떼어내겠다고 벼른다. 샤일록은 유태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안토니오를 증오하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딸 제시카가 기독교도인 로렌조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분노해 광적인 적개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안토니오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 된다. 그러나 샤일록의 분노와 증오심은 또 다른 방향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즉 서양문학에 드러나는 타 인종에 대한 차별의 측면이다. 샤일록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유태인은 눈이 없나? 유태인은 손이 없나? 오장육부, 감각, 감정, 정열도 

         없단 말인가? 우리도 기독교인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다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으로 낫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울 것 

         아니겠소?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단 말이오? 간지럼을 태워도 

         웃지 않고, 독을 먹여도 죽지 않는단 말이오? 다른 모든 일에도 당신네들과 

         같다면 이 일에서도 뭐가 다를 게 있겠소. 유태인이 기독교인을 모욕한다면 

         보복을 할 것은 당연한 이치요. 그러니 기독교인이 유태인을 박해하면 우리도 

         그들을 본 따 똑같이 해야겠지. 복수요!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악행을 실행 하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배운 것 이상으로 갚아 주리다.

                                                            (샤일록, 3막 1장)   

  ‘베니스의 상인’은 이런 점에서 인종 차별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질투심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어리석은 오셀로를 흑인으로 설정한 것과 같이, 잔인하고 교활한 고리대금업자로 유태인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태인들은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어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된 후 유럽 전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핍박을 받았다. 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멸과 적대감은 인종적인 측면에서 온 것도 있지만 그들의 종교가 큰 이유기도 하였다. 그들이 믿고 있던 유태교는 성경의 구약을 기독교와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구세주로서의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러한 종교적 차이가 기독교도인 유럽인들이 유태인을 경원하게 만든 이유였던 것이다. 한편 유태인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이어가야 했으므로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돈만 아는 천박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2,000여 년에 걸친 유태인들의 고난은 20세기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나치의 가스실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홀로코스트(holocaust, 대학살)라 부른다. 2차 대전 이전에 전 세계 유태인의 인구는 1,800만 명에 달했으나 홀로코스트 이후 1,000만 명으로 급감했다니 소위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나치의 만행은 역사에 기록된 가장 사악한 비극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핍박받던 유태인을 무자비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인종과 종교의 문제를 제기한다. 유태인 샤일록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고 인종 전체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베니스의 상인’은 정의와 자비라는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안토니오의 법정에서 샤일록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친다.    

        “여러분들은 많은 노예들을 사서 부리십니다. 노예들을 당나귀, 개, 

         노새처럼 천하고 고된 일에 마구 부려 먹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주고 

         샀기 때문이겠죠. 이런 말씀을 한번 드려 볼까요? "노예들을 해방시켜 

         상속녀인 따님들과 결혼시키시오. 어째서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땀을 

         흘리게 하는 건가요? 그들의 잠자리도 여러분들과 똑같이 푹신하게 해 주시오. 

         음식도 여러분들이 드시는 것과 똑같이 입에 맞게. 이렇게 말하면 

         ‘그 노예들은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산 우리의 소유물이다."라고 대답하실 테죠. 

         제 대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 자에게 제가 요구하고 있는 1파운드의 

         살덩이는 비싼 대금을 치르고 산 제 것입니다. 전 꼭 그걸 갖겠습니다. 

         각하께서 저의 뜻을 거절하신다면 법률이고 정의고 다 소용없어요! 

         자,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어떻습니까---살을 떼어도 좋습니까? “    

  샤일록이 주장하는 것은 법에 의해 지켜지는 정의라는 개념이다.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떠한 행위도 저지를 수 있는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비슷한 열정과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개개인의 삶의 욕구를 지키기 위해 계약을 맺는다. 이것이 홉스 사회 계약설이다. 그렇게 계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에는 법률이 있다. 즉 누구에게나 공정한 규칙이 만들어진다. 그 법률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정의이다. 위에서 샤일록이 얘기하는 법과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소유물을 자유로이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의이다. 그렇게 샤일록은 안토니오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지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논쟁이 그것인데 두 사람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법의 이상과 현실을 나타낸다.    

소크라테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봅니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통치받는 시민을 이롭게 하는 사람 아닙니까?

트라시마코스... 소크라테스 선생님, 그러면 목동들은 양을 위해 양을 모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소크라테스... 글쎄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 법이 누구 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했다. 그만큼 법이 지니고 있는 이상적인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통치자들이 만들어 낸 법은 바로 시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법은 정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트라시마코스는 법이 지배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법이 지키는 정의는 단지 강자들의 정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법의 집행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진다. ’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자조적인 말은 법이 얼마나 외부적 상황에 따라, 즉 부와 권력에 따라 왜곡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는 언제나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의 시인 가자난 마쉬라(Gajanan Mishra)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에 대해 말하지도 말라. 역겹고, 따분할 뿐이니...‘     

  법이 정의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공정함을 해치는 경우, 법은 인간을 향한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시행되었던 ‘우생학적 불임 법안’은 태생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강제로 불임시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캐리 버크라는 한 여성이 이 법안의 희생자가 된다. 그녀는 정신박약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한 가정에 입양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양부모의 조카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양부모는 집안의 체면만을 생각해, 거짓 구실을 꾸며 캐리를 정신이상자를 수용하는 시설에 가둔다. 많은 사람들이 캐리의 처지를 동정해 그녀를 시설에서 구하려고 했지만 법원은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으므로 시설에서 나오려면 불임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법치주의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은 폐지된 이 법안은 2차 대전 이후 나치 전범들의 유태인들에 대한 만행을 변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법이 언제나 정의로울 수 없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법은 공정함을 추구한다. UCLA 연구팀은 2008년 ‘인간의 뇌에서 공정함에 반응하는 부분은, 쥐의 뇌 중 음식에 반응하는 부분과 같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즉 공정함에 대한 열망이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이 공정함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법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정의에 불신을 품게 된다. 샤일록은 정의를 부르짖는다. 법의 공정한 집행을 요구한다. 모두가 그의 자비를 간청하지만 샤일록은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법이 사악한 정의를 지켜야 하는가. 이 절체절명의 순간 판사로 변장한 남장 여인 포오셔가 등장한다. 다시 한번 셰익스피어 희극의 복장 전도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복장 전도는 한 여성이 판사가 되는 신분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잔인한 법의 정의에 대항하는 기독교 정신의 구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녀는 정의를 주장하는 샤일록에게 자비의 정신을 설득한다.            

        “자비라는 건 의무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 대지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것이오. 

         이중으로 축복받는 것이지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축복을 받는 것이며, 

         최고의 미덕이고 국왕의 왕관보다 더 국왕답게 해주는 미덕입니다. 군왕의 

         왕홀은 현세의 권력을 상징하는데 불과하지요. 경외와 준엄함의 표시로 왕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나타내지만, 자비는 왕홀의 위력을 능가하며 왕의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신이 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권력이 신의 권세에 접근함은 자비가 정의의 엄격함을 완화시킬 때인 

         것이지요. 그러니 유태인이여, 그대가 호소하는 바는 정의이지만 정의만 

         내세우면 구제를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우리는 자비를 

         구하여 기도드리고 기도가 우리에게 자비로운 일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그대가 정의를 고집한다면 

         이 엄격한 베니스의 법정은 부득이 저 상인에게 불리한 선고를 내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     (포오셔, 4막 1장)    

  샤일록은 포오셔의 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기독교적 자비의 정신은 샤일록에 의해 거부당한다. 그는 자비보다 법의 정의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정의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그의 의도 때문에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포오셔는 샤일록이 주장하는 법의 정의를 내세워 판결한다. 득의양양한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을 떼어가기 위해 다가갈 때 포오셔가 그에게 말한다.     

        “잠깐 기다리시오. 더 얘기할 말이 있소. 이 증서에 피는 단 한 방울도 

         적혀 있지 않소. 여기에 명기되어 있는 말은 ‘살 1파운드’ 뿐이요. 

         증서대로 살을 1파운드만 떼어 가시요. 단 살을 떼 내면서 기독교도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그대의 토지와 재산은 베니스의 법률에 의하여 

         국가가 몰수할 것이오. “        (포오셔, 4막 2장)    

  ‘눈에는 눈’이라 했던가. 포오셔는 법률에 의해 안토니오를 구해냈던 것이다. 당황한 샤일록은 빌려준 돈만 받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포오셔는 법을 내세워 샤일록에게 엄중한 판결을 내린다. 즉 전 재산을 몰수하여, 반은 안토니오에게 반은 국가에 귀속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샤일록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제 생명이고 뭐고 다 가져가시오. 감형도 필요 없소. 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빼 가버리면 집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살아갈 

         재산을 빼앗아 가면 그게 바로 내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지요. “ 

                                             (샤일록, 4막 2장)    

  이때 안토니오가 나선다. 그리고 샤일록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샤일록은 재판에 참석했던 공작의 사면으로 국가에 귀속될 재산 절반을 가까스로 돌려받게 된다. 한편 안토니오는 자신이 얻게 될 샤일록의 재산 절반을 관리하다가 그가 죽으면 그의 딸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즉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극은 그렇게 자비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안토니오는 생명과 함께 친구의 우정을 얻고, 바사니오는 아름답고 현명한 포오셔를 아내로 맞이한다. 한편 편견과 적대감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일록의 딸은 기독교인인 로렌조와 결혼한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과 함께 극은 끝이 난다.     

  ‘베니스의 상인’은 기독교와 유태교의 종교적 갈등, 돈에 눈이 먼 샤일록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 우정과 사랑의 정신, 그리고 법의 정의와 자비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자비의 정신이 모든 것에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법의 정의에 대한 불신은 물론 우정과 사랑, 자비의 정신도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인다. 돈을 위해 우정을 버리고, 적개심으로 가득 차 누구도 용서하지 못한다. ‘베니스의 상인’은 그런 오늘의 우리에게, 증오에 가득한 오늘의 샤일록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가르쳐준다.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을 유태인으로 설정하여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딸 제시카와 로렌조의 사랑을 통해 더 큰 화해와 화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망에 빠진 샤일록을 미워할 수만 없는 것은 그저 동정심에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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