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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9. 2020

자에는 자로, 사랑의 정염과 법

셰익스피어 인문학: Measure for Measure

  한 국가가 올바로 통치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법률이 있어야 한다. 그 법률에 따라 질서를 지키고 타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 법률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국민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법률이 있어도 그 법률에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또한 그로 인해 아무도 처벌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법률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에는 자’라는 표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표현으로 누군가 죄를 저지른다면 그 죄에 해당하는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처벌과 같이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라는 작품 속에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한 가지 법률이 등장한다. 결혼하지 않고 사랑의 정염에 빠져 육체적 관계를 갖는 연인들을 사형에 처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작품의 배경이 되는 비엔나라는 도시에서는 이 법이 도무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도시를 다스리는 공작이 너무도 관대해서 법을 어겨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 도시는 점점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시되고 풍기가 문란해지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함께 살거나 심지어는 결혼한 사람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마침내 공작은 자신의 통치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법치를 확립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덕망이 높고 철저히 원칙을 지킬 것으로 보이는 안젤로라는 신하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기로 결정한다. 

  공작은 외국에 나간다고 말하고는 변장을 한 채 다시 돌아와 은밀히 일의 진행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엄격한 법 적용이 필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클라우디오라는 청년이 젊은 아가씨를 유혹한 죄로 고발되었다. 공작 대행인 안젤로는 당연히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한다. 위기에 처한 클라우디오는 수녀가 되기 위해 수녀원에서 수련 중인 자신의 여동생 이사벨에게 친구를 보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안젤로에게 탄원해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소식을 들은 이사벨은 오빠를 구하기 위해 안젤로를 찾아가 오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간절히 청한다. 하지만 안젤로는 이사벨의 탄원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에게는 공작을 대신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이사벨의 애원에 그의 마음이 움직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다음날 다시 찾아오라고 말한다. 이사벨이 돌아간 후 안젤로는 충격에 빠진다. 그 짧은 순간에 이사벨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욕정에 불과함이 곧 드러나고 만다. 

  다음날 이사벨을 만난 안젤로는 오빠의 사형을 면하게 해주는 대가로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이사벨은 공작 대행의 부당한 요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는 오빠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한다. 운명을 받아들여 처벌을 감수하라고 간청한다. 클라우디오도 여동생의 그러한 호소를 눈물로 받아들인다. 그때 신부로 변장한 공작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그들을 측은히 여긴 그가 남매를 위해 계책을 꾸민다. 사실 안젤로는 공작이 생각했던 만큼 정의롭고 올곧은 사람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그는 심지어 지참금을 가져오지 못한 자신의 악혼녀 마리아나를 냉대하고 버린 비열한 사람이었다. 

  공작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이사벨에게 오빠를 구할 계책을 알려준다. 안젤로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고 실제로는 마리아나를 두 사람의 약속 장소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오빠를 구할 기대감으로 그의 계책을 받아들인다. 과연 안젤로는 사악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더라도 이사벨의 오빠 클라우디오를 살려줄 마음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클라우디오를 새벽에 서둘러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현명한 공작의 배려로 클라우디오는 목숨을 구한다. 감옥을 나온 클라우디오는 그가 사랑하는 줄리엣과 결혼을 하게 된다. 또한 공작은 정숙하고 현명한 이사벨에게 청혼을 한다. 이중의 인격을 가졌던 안젤로에 대해 공작이 사형을 내리려는 순간, 그의 착한 마리아나가 안젤로를 대신하여 죄를 빌며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공작이 그녀의 청을 들어주어 모두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베니스의 법은 결혼을 통해서만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혼은 진정한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있어야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엄격한 법의 집행만이 능사가 아니라 관용과 자비를 통한 죄의 회개와 깨달음이 언제나 처벌보다 앞서야 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자에는 자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다는 “사랑은 사랑으로”라고 바꿔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자비만큼 죄를 대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Nothing emboldens sins so much as mercy.) ‘아테네의 타이몬’에 나오는 구절이다. 처벌하지 않으면 결국 죄는 더욱 대담해져서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는 처벌과 관용이다. 일벌백계로 다스리거나, 반대로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자에는 자로’는 죄에 대한 이 두 가지 태도를 극화하고 있다. 제목은 엄격한 법의 원칙을 의미하고 있지만, 실제 극에서는 죄와 그에 따르는 대가뿐 아니라 자비를 통한 죄의 용서를 아울러 언급하고 오히려 후자가 진정한 법정신에 부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죄는 남녀 간의 사랑이다. 셰익스피어는 정염의 불꽃이 죄가 되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의 초반에서 공작의 권한을 위임받은 안젤로는 경직된 법체계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는 여인을 유혹한 죄를 물어 한 젊은이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오랫동안 무의미한 것으로 사장되고 있던 법을 전가의 보도인양 꺼내어 새로운 법질서와 규범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본인의 성품도 있지만, 작품 속의 세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사회적으로 지나친 타락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에서도 기인한다. 

  하지만 그도 이사벨이라는 아가씨의 아름다움과 정숙함에 사로잡혀 법의 엄격함을 버리고 사랑의 본능에 압도된다. 사형수의 여동생인 그녀가 자비를 청하는 순간 안젤로는 자신도 죄인이 되어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그는 사형수의 목숨을 미끼로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키려 한다. 결국 사랑의 정염은 법적인 규율과 규범으로 속박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마는 것이다. 남녀 간의 욕망과 욕정이 규제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법도 규범도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 감정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가?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는 삶의 본능으로 추앙되어 억제될 수 없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결혼으로 끝난다.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의 결합이라는 행복한 결말인 동시에 고삐 풀린 사랑의 감정을 묶어두는 수단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랑이 완수되고 그 사랑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서는 법으로도 규제할 수 없는 욕망의 흐름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젤로는 자신의 약혼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곡된 방식으로 이사벨의 사랑을 얻으려 하였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파괴하고 오로지 정염에 이끌려 혼돈의 세계를 방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사벨은 오빠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안젤로의 유혹을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는데, 이것이 자유로운 사랑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숭배자였다. 정작 자신은 어린 나이에 여덟 살 연상의 여인을 만나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했고, 이유야 어떻든 마침내는 가정을 버리고 런던으로 상경하여 극작가가 되었지만, 그의 극에서는 결혼이 지고의 가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는 정말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본 것일까? 

  셰익스피어가 이끌어내는 남녀의 결혼은 극의 행복한 결말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랑이 전제된, 그래서 사랑을 완성하는 결혼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네트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하지 않게 하소서...”(Let me not to the marriage of true minds admit impediments...)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구실이 생겼다고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버릴 이유가 생겼다고 휘어지는 것도:     

  셰익스피어에게 결혼은 진정한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의 목적지였다. 그리고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결혼이 없이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사랑의 그림자일 뿐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법으로는 안 되지만 마음으로 이루어내는 행복한 삶,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꿈꾸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법은 인간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 욕망, 사랑은 강제할 수 있는가? ‘자에는 자로’의 기본 주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법에 앞서며, 법이라는 것도 엄격함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인성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극은 비엔나의 공작이 법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한을 공정하고 엄격한 인물로 평판이 높은 안젤로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작은 안젤로에게 그의 뛰어난 능력이 사람을 이롭게 해야만 비로소 빛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사람이 횃불을 쓰듯이, 하늘은 사람을 쓰게 마련이오. 

         횃불이 자신을 밝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미덕도

         남을 돕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오. 우리의 정신이 멋지게 만들어진 이유는 

         멋진 결과를 얻기 위함이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그 능력을 조금이라도 빌려준다면,

         자연은 인색한 여신이므로, 빌려준 자의 특권으로 

         사례는 물론 이자까지도 받아내려 하는 것이오. 

                                        (Act I, Scene 1)         

  그러나 권한을 위임받은 안젤로는 이자벨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법의 정신을 망각한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는 이자벨의 오빠를 사면하는 대가로 그녀의 순결을 원한다. 안젤로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 때문에, 당신의 미덕 때문에!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럴까? 그녀의 잘못인가 아니면 내 잘못인가? 

         죄는 유혹하는 자에게 있는가, 유혹당하는 자에게 있는가?

         하!

         그녀가 유혹한 것은 아니야. 내가 나쁜 것이지. 

         양지에 핀 바이올렛 꽃 옆에 누워 

         꽃과는 달리, 썩은 고기처럼 

         나는 부패하고 있군. 

         여자의 가벼움보다 그 정숙함 때문에 

         정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 

                                        (Act II, Scene 2)            

  이자벨은 오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결코 자신의 정절을 버리지 않겠노라 결심한다. 그리고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권력의 횡포에 단호히 맞선다.     

                     ... 오, 무서운 입

         다 같은 하나의 혀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법률을 자기 마음대로 쓰고

         옳고 그름을 자기 입맛대로 낚아내어

         끄는 대로 따르게 하다니!

         ......

         그러니 이자벨, 순결을 지키고 오빠를 죽도록 내버려 두자:

         순결이 혈육보다 소중한 것이니까. 

         오빠에게 안젤로의 요구를 알리고,

         죽음을 각오하게 하자.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Act II, Scene 4)    

  얼마나 단호하고 대찬 결심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지켜야 할 대의쯤은 저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이자벨의 독백은 일종의 경고이다. 마침내 안젤로의 죄상이 드러나고 공작은 단호하게 외친다.    

         법의 그 자비로움도 공공연히 소리 높여

         외치는구나.

         ‘클라우디오를 보상하는 데 안젤로로써 하라, 죽음에는 죽음으로!’

         급한 것에는 급한 것으로, 여유로움에는 여유로움으로 응하고,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으로 대하고, 자에는 자로.

         자, 안젤로, 그대의 죄과가 이렇듯 드러났으니

         부정해봐야 소용없다. 

         클라우디오가 참수된 그 단두대로 

         그대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서둘러 보내노라.

         그를 끌어내라!

                                       (Act V. Scene 1)    

  그러나 공작의 선고는 사면으로 끝난다. ‘자에는 자로’에서는 누구도 법에 의해 처형되지 않는다. 모든 죄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법의 엄격함은 자비의 관용으로 무력해진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교훈일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공작의 현명함이 없다. 그래서 현실의 세계에서는 역시 ‘자에는 자로’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법을 만들고 스스로 그 법의 무게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자에는 자’에서 공작은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법률에 대해 걱정한다. 법은 적용되지 않아도 존재해야 하는가? 법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혼란

과 타락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법률도

         집행을 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방종은 정의의 코를 잡아 비틀고, 

         어린아이는 유모를 두들겨 패며

         모든 예의범절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겠지. 

                               (Act Ⅰ, Scene 3)    

  한편 극 중의 한 사람은 클라우디오에게 내려진 사형이라는 형벌이 그의 행위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함을 말한다. 법의 그릇된 집행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어떤 자는 죄로 흥하고 어떤 자는 미덕으로 망하는구나.

         어떤 자는 준엄한 법망을 뚫고 도망쳐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어떤 자는 단 한 번의 과실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Act Ⅱ, Scene 1)    

  처녀를 유혹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클라우디오, 그리고 그가 유혹한 여인 줄리엣. 공작은 줄리엣에게 클라우디오를 향한 그녀의 애정에 대해 묻는다. 사랑의 유혹은 당한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죄가 된다. 사랑의 범죄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을 받은 사람. 수사로 가장한 공작과 줄리엣의 대화는 그 사랑의 공범에 대해 말한다.    

         공작 : 아가씨를 유혹했던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소?

         줄리엣 : 예 그분을 유혹했던 여인을 제가 사랑하듯이 사랑하나이다.

         공작 : 하면 엄중한 것으로 보이는 범죄를

                 두 사람이 함께 범했단 말이오?

         줄리엣 : 함께 저질렀나이다.

         공작 : 하면 아가씨의 죄가 그의 죄보다 더 무거운 것이요.

         줄리엣 : 그 점을 저도 인정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Act Ⅱ, Scene 3)    

  죄의 용서는 자비심에서 비롯된다. 안젤로의 정염은 이사벨에게는 순결을, 그녀의 오빠 클라우디오에게는 생명을 두고 벌이는 사악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사벨을 범하지도 그의 오빠를 죽이지도 못했다. 계획은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범죄는 처벌될 수 없는 것일까? 죄는 반드시 행동에서만 오는 것일까? 이사벨은 공작에게 안젤로를 위해 용서를 구한다. 그것은 이사벨의 자비심일까 아니면 이긴 자의 여유일까.      

         엔젤로경으로 말하자면

         그의 행위가 그의 나쁜 의도에 부합하지는 못 하였으며

         단지 도중에 좌절되어버린 의도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냥 묻어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생각은 실체가 아닙니다.

         의도는 다만 생각에 불과합니다.

                                             (Act Ⅴ, Scene 1)     

  이사벨의 자비와 관대함에 안젤로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 자비는 뉘우침을 일깨우는 가장 훌륭한 무기일 것이다.    

         이런 슬픔을 초래한 점 죄송합니다.

         참회하는 이 가슴에 그 슬픔이 너무 깊이 박혀있어서

         자비보다는 죽음을 내려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니 진정으로 죽기를 간청 하나이다,

                                      (Act Ⅴ, Scen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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