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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6. 2020

말괄량이 길들이기, 대립과 화합

셰익스피어 인문학: Taming of the Shrew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의 공동체는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동물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수컷들은 씨만 뿌리고 멀어져 가거나 암컷이 차지한 그 공고한 씨족 사회의 주변을 배회할 뿐이다. 그랬던 수컷이 공동체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였다. 그들의 육체적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컷의 세상, 남성 중심의 세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남성들에 의해 지배된 세상의 기록이었다. 남성들의 세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성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언제나 조연일 뿐이었다. 그들은 남성들의 그림자로 살아왔고, 남성들에 의해 강요된 역할만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는 그녀의 저서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여성들은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여주인공 캐서린은 남성 중심 세상의 이단아였다. 그녀는 어떤 남자도, 어떤 외부적 힘도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 뱁티스타 조차 그녀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청혼하러 온 남자들을 향해 거친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 봐요. 누가 더 마음에 들어요? 나? 동생? 

         (그레미오에게) 애도 만들 수 없는 이 영감탱이, 주제에 고르긴 뭘 골라요. 

         (호텐쇼에게) 그리고 당신 함부로 주둥이 놀리다가 머리통 깨질 줄 알아. 

         이 양반들아, 누가 사랑받지 못해서 환장한 줄 알아? 이런 얼간이들! “

                                                  (캐서린, 1막 1장)    

  16세기 여성의 발언이 맞기는 한가? 캐서린은 못된 성격, 거친 말투로 악평이 나있었다. 걸핏하면 분노를 터뜨리고,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면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왜 그렇게 비뚤어져 있었을까? 그녀의 거친 성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동생만을 총애하는 아버지의 편견, 남성들의 태도에 대한 혐오감, 남편감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녀의 독립적이고 지적인 성품 때문에 아버지에 순종하고 남성들에게 가식적인 예의를 차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적인 관습과 주변의 강요에 분노하고 그것에 저항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그려내고 있는 새로운 여성상, 즉 남성 중심의 세상에 홀로 도전하는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여전히 남자와 결혼에 집착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저항아로서의 한계를 드러낸다.    

        “아버지는 저 애가 더 귀엽죠? 그러니 신랑감을 얻어 줘야죠. 

         난 저 애 결혼식 날 맨발로 춤이나 출까요? 아버지가 언제나 

         저 애만 싸고도니까 난 어물전 꼴뚜기 밖에 더 돼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주저앉아 울다 벌떡 일어서며) 

         두고 봐요. 내 꼭 이 원수를 갚고 말 테니!    (캐서린, 2막 1장)    

  그렇게 동생 비안카에 대한 질투와 불안감이 그녀의 삶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그녀에게 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페트루키오. 그는 캐서린이란 여성에게 보다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녀와 결혼하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지참금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거친 성품은? 그것쯤이야. 그는 어떤 여성도 길들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자네가 만일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마누라 감을 알고 있다면, 

         비록 그 여자가 아무리 천하 박색이라 해도, 아무리 늙었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부인처럼 바가지를 긁어댈 소질이 다분한 여자라도 

         난 받아들일 용의가 있네. 내가 이곳 파두아에 온 이유는 결혼도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니까. 부자가 되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 

         그래 그 여자가 누군가?    (페트루키오, 1막 2장)    

  페트루키오의 첫 번째 전략은 캐서린의 아버지 뱁티스타를 만나 결혼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었다. 결혼 문제에 있어 딸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자 사회적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몰락하기는 했지만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으므로 뱁티스타는 그가 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조건 하에 결혼을 승낙한다. 이제 페트루키오는 캐서린을 만나야 한다. 과연 그의 자신감은 캐서린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그의 전략은 이랬다.     

        “오기만 해라  세차게 녹여 버릴 테다. 그녀가 험한 소리를 하면 

         나는 마치 꾀꼬리의 노래같이 아름답다고 해주지. 얼굴을 찌푸리면 

         마치 아침 이슬에 젖은 장미와 같이 아름답다고 해주지. 

         입을 다물고 아무 소리 안 하면 그 침묵이야말로 가슴을 울리는 

         웅변이라고 칭찬해야지. "나가"라고 소리치면, 고맙지만 붙잡아도 

         일주일밖에 못 머무르겠다고 대답해주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식장은 어느 교회를 택하고 결혼은 어느 날에 할 것인지 

         정하자고 말해야지. “    (페트루키오, 2막 1장)    

  캐서린을 처음 본 순간 그는 그녀를 애칭인 케이트라 부른다. 친밀감을 과시하며 그녀와의 만남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속셈이었다. 또한 케이트라는 이름은 고양이라는 뜻의 캣(Cat)의 펀(pun: 비슷한 음의 다른 언어를 이용한 말장난)으로, 캐서린을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들고양이에 비유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를 길들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도전의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캐서린은 반응은 냉정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 선 대화들. 그들의 대화에는 긴장감과 함께 성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역시 남녀 사이에는 성적인 교감이 없을 수 없는 모양이다.    

캐서린    : 마침 잘 왔군요. 여기까지 발을 옮겨 왔다니 발을 옮겨 나가 줘요.  

            나는 첫눈에 알았으니까. 당신은 옮기기 쉬운 가구라는 걸.

페트루키오: 아니 옮기기 쉬운 가구란 무엇이요?

캐서린    : 접었다 폈다는 걸상.

페트루키오: 맞았소. 내가 바로 걸상이요. 자, 그러니 케이트  내 위에 올라타시오.

캐서린    : 올라탈 수 있는 것은 당나귀지. 당신이 바로 그거야?

페트루키오: 올라탈 수 있는 것은 여자야. 당신이 바로 그렇지.

캐서린    : 설사  그렇더라도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올려 태울 암말은 아니거든!

                                                                    (2막 1장)    

  20세기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는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억압적 기구(repressive apparatus)로 군대, 공권력, 법률 등, 힘을 이용한 강제에 의해 통제하는 방법이다. 사람은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갈등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률을 만들고 공권력에 의해 스스로를 통제한다. 국가는 그러한 힘의 메커니즘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다. 알튀세가 말하는 두 번째 방법은 이념적 기구(ideological apparatus)이다. 학교, 교회, 가정 등, 생각의 조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통제를 가리킨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삶의 방식, 시민으로서의 의무,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일종의 세뇌이다. 종교니 도덕률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생각을 고착시킴으로써 사회가, 국가가 요구하는 시민으로 성장시킨다. 그렇게 국민을 통제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페트루키오가 구사하는 전략의 요체가 된다. 그가 캐서린을 케이트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알튀세가 ‘호명’(interpellation)이라 칭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특정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주체를 규정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여성에 대해 누구의 어머니라고 명명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주체가 되고 그렇게 부여받은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이라는 본질은 사라진다. 그렇게 통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트루키오가 그녀를 케이트라고 부르는 순간, 과거의 그녀는 소멸되고 케이트라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페트루키오는 캐서린이라는 여성을 재규정하고 그로써 그녀의 주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알튀세가 제시한 두 가지 방식을 페트루키오가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살펴보자.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에 아버님이 벌써 승낙을 하셨고  

         지참금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았소. 이제 나는 당신의 남편이요. 

         이 햇빛 아래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하네요. 그러니 이 햇빛에 

         맹세코 당신은 나 이외의 딴 남자와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되오.  

         왜 나면 나는 그대를 길들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살쾡이 케이트를 집안의 고양이 같이 얌전한 케이트로 만들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란 말이요. “          (페트루키오, 2막 2장)     

  캐서린을 조종하기 위한 페트루키오의 방식은 이렇게 억압적 구조의 사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딸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 결혼이라는 제도, 그리고 남편의 권위 등이 억압적 구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은 늘 아버지와 대립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결코 아버지에 대한 불복종과 거부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아버지라는 강력한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저 애만 싸고도니까 난 어물전 꼴뚜기 밖에 더 돼요?” 위에 인용된 2막 1장 캐서린의 대사는 그녀의 불만과 비뚤어진 심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또한 그녀 역시 결혼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 비안카를 괴롭힌다. 그녀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자신의 여성성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서운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페트루키오는 그런 캐서린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서린의 외모와 성품을 끊임없이 찬양한다. 즉 그녀의 여성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이 불가피하며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상황에 순응토록 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결혼식 당일 날부터 시작된다.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늦게 신부 집에 도착한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옷을 입고 나타난 그는 결혼식 의상으로 갈아입으라는 주위의 간청에 이렇게 대꾸한다.    

        “나와 결혼하는 것이지 의복과 결혼하는 건가요? 

         할 수만 있다면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을 내게 맞도록 

         뜯어고치고 싶습니다. 이런 헌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케이트도 좋고 내게도 더욱 좋은 일이죠. “

                                         (페트루키오, 3막 2장)    

  결혼식의 광경도 가관이었다. 주례의 질문에 고래고래 소리치고 신부의 목덜미와 입술에 누가 봐도 천박하게 키스를 하는가 하면, 설상가상으로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하객들을 남겨두고 신부와 즉시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피로연에 참석하겠다는 캐서린의 반발에 페트루키오는 짐짓 거칠게 주변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나의 동산이요, 나의 집이요, 나의 말이요, 나의 소요, 나의 

         당나귀요. 모두 내 것이죠. 여기 나의 신부가 서  있소. 누구든지  

         감히 이 여자에게 손을  대 보시오. 나의 갈 길을 막는 자는  

         이 파두아에서 아무리 잘난 자라 할지라도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 (칼을 뺀다)

                                           (페트루키오, 3막 2장)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캐서린의 남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을 한껏 행사한다. 이제 캐서린은 법적으로, 관습적으로 아내로서의 미덕과 복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캐서린으로 하여금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페트루키오의 억압적 구조가 작동한다.     

  자신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캐더린이 타고 가던 말이 쓰러져 그녀가 그 밑에 깔린다. 페트루키오는 아내를 도와줄 생각은커녕 애꿎은 하인을 구타하며 심술을 부린다. 결국 캐서린은 흙탕길을 걸어야 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트집을 잡아 하인들을 괴롭히고, 준비된 저녁도 음식을 문제 삼아 식탁을 뒤집어엎는다. 하루 종일 굶은 캐서린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침실에서도 페트루키오의 억지는 계속된다. 첫날밤 잠자리에서 금욕에 대해 얘기하고 마치 미친 듯이 행동하는 남편 때문에 캐서린은 앉지도 못 한 채 망연자실이다. 페트루키오의 두 번째 계략은 신부의 생각을 바꾸고 조종하는 이념적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까 구운 고기로 트집을 잡았듯 이번엔 잠자리를 가지고 

         생트집을 잡아 베개, 베개 받침, 이불, 요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다 

         내동댕이쳐야지. 이런 소동을 벌이면서도 이것이 다 자기를 존중하고 

         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해. 밤새껏 한숨도 못 자게 해야지. 

         졸기라도 하면 고함을 질러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할 것! 이것이 

         나의 친절로써 마누라의 기를 꺾는 방법이야. 그 미치광이 같은 쇠고집을  

         고쳐주고 말겠어. “      (페트루키오, 4막 1장)    

  이념적 구조를 통해 국민은 국가의 통제를 따르는 시민으로 성장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의 우애, 생활 방식, 관습 등을 배우고, 학교에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규칙을 배운다. 교회에서는 교리에 따른 삶의 지침을 얻는다. 그렇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행동과 생각의 규율을 개인적, 집단적으로 습득한다. 페트루키오는 캐서린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종하도록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계획은 계속된다.

  아침이 되자 굶주린 캐서린은 하인이 차려온 보잘것없는 음식을 보고 화를 내지만 페트루키오가 음식을 치우라고 하자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재단사가 지어온 신부의 새 모자와 가운을 캐서린이 맘에 들어 하자, 페트루키오는 또다시 트집을 잡아 그녀의 의지를 꺾어놓는다. 그리고 느닷없이 다시 캐서린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지친 캐서린은 이제 무기력하게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페트루키오는 이제 상대의 생각을 완전히 통제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페트루키오: 자 가자. 드디어 우리 장인어른 집에 가까워졌군. 달빛이 찬란하네.

캐서린    : 달이라고요? 태양이에요. 지금 이 시각에 달이라니요.

페트루키오: 달이라니까. 찬란하게 비치는 것이.

캐서린    : 아니에요. 태양이에요. 찬란하게 비치는 것은.

페트루키오: 어머니의 아들,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하지만 저건 달이야. 

            내가 무엇이라 하던 그것이라면 그것인 거야. 적어도 장인어른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래야 해!  에잇, 말들을 뒤로 물려라. 언제든  

            내 말이라면 쌍지팡이를 들고 나서니! 

................

캐서린    :........ 애원합니다  달이든 태양이든 무엇이라도 좋아요. 

            골풀로 만든 양초라 한들  어떻겠어요. 앞으로  나도 그렇게 부르겠어요.

페트루키오: 틀림없는 달이야.

캐서린    : 그래요 달이예요.

페트루키오: 그럼 당신은 거짓말쟁이지. 저건 명백히 태양이야.

캐서린    : 그럼 분명히 태양이죠. 그러나 당신이 아니라면 태양이 아닌 거고요. 

            달은 당신의 마음대로 여러 가지로 변해요. 당신이 부르는 대로 그렇게 

            변하죠. 그러면 나도 그대로 부르겠어요.  (4막)    

  캐서린의 진심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관습과 규범, 규칙과 규율은 개인의 기호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영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만든 이념적 구조 속에 스스로를 일치시키고 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그녀의 변화는 그대로 의지가 되고 신념이 되고 믿음이 된다. 우리 모두가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본 대로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만든 제도, 법률, 관습과 규칙들에 대해 우리는 불편함이나 저항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페트루키오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녀의 외적 변화로 판단하면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캐서린은 이렇게 선언한다.      

        “쓸 데 없어요. 헛짓이에요. 그런 쌀쌀맞고 찌푸린 눈살을 펴세요.

         그런 오만한 눈초리로 쏘아보면 자신의 주인이요, 성주요, 군주인 

         남편에게 상처를 주게 되니 아예 그래서는 못씁니다. 여자가 성을 

         내면 흐려진 샘물 같이 되죠. 흙탕물이 우러나고 혼탁해져서 

         아름다움이 간 데 없게 되어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여자에 갈증이 난 

         남자라도 그런 여자의 샘물을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댈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남편은 당신의 성주요, 당신의 생명이요, 당신의 수호자요, 당신의 지엄한 

         군주입니다. 당신을 위해 걱정하고 당신을 부양하기 위해 바다에서 육지에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던져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디 

         당신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던가요? 다만 사랑과  맑은 안색과 진심으로 

         순종하는 것만을 바랄 뿐입니다. 나도 당신네처럼 한때는 마음도 생각도 

         부풀대로 부풀어서 말에는 말로, 분노에는 분노로 일일이 대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나는 좀 더 이성적이었지요. 이제야 알겠어요. 우리들이 던진 

         창이란 지푸라기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그러니 머리를 숙이고 성미를 

         버리세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   (캐서린, 5막)    

  놀랍지 않은가? 말괄량이 캐서린이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아내로 변화하다니! 그녀는 남편의 심술에 굴복해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내의 역할과 위치를 인식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페트루키오는 자신의 승리를 선언한다.    

        “자, 케이트 우리 잠자리로 갑시다..... 그대들은 과녁을 맞혔지만 내기에는 

         내가 이겼소. 승리자가 된 이상 이제 그만 안녕! “ (캐서린과 함께 퇴장)  (5막)    

  과연 그럴까? 페트루키오는 승리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말괄량이 캐서린을 그렇듯 순종적인 여인으로 만들었으니. 하지만 캐서린의 변화가 그의 계책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그녀의 변화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셰익스피어는 그의 낭만희극 안에서 현명하고 용기 있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한 여름밤의 꿈’의 헬레나,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 ‘십이야’의 비올라. 그녀들 모두는 남성의 무모한 열정, 편견, 환상 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쟁취한다. 남자들보다 더 강하고 지혜롭다. 그런 여성의 전형 중에 말괄량이 캐서린을 포함시키면 어떨까?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의 편견에 저항했던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관습과 제도의 벽 앞에서 불안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남편 페트루키오. 그는 지참금을 위해 그녀와 결혼했고, 교활한 계략을 통해 그녀를 조종하고 통제하려 한다. 캐서린은 그런 그를 수용한다. 나약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가장 적합한 적응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을 더 이상 대립과 적대의 관계로 여기지 않는다. 각자의 장점과 한계를 인식하고 더불어 공존하는 화합과 협력의 관계를 지향한다. 캐서린의 변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순종은 페트루키오를 무장해제시킨다. 그리고 아마도 캐서린은 남편을 조종하고 통제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계략이 아니라 서로의 진정한 결합을 위해 지혜와 용기로 그 일을 해낼 것이다.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의 모습이다. 이제 남성과 여성은 화해하게 된다. 페트루키오에 의해서가 아니고 캐서린에 의해서 말이다. 현대의 캐서린이 기다려진다. 그러한 여성을 창조한 셰익스피어는 어떤 점에서 보아도 결국 페미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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