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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6. 2020

십이야, 혼돈 속의 사랑

셰익스피어 인문학: The Twelfth Night

  십이야, 열두 번째 밤. 예수가 탄생한 날로부터 십이일이 지난 그날, 아기 예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 공현축일의 밤. 그것은 축제의 날이었다. 모두가 즐겁고, 모두가 자유분방했던 혼돈의 축제. 그 자유와 혼란이 ‘십이야’의 배경인 오르시노 공작의 나라 일리리아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여자가 남자가 되고, 오빠가 여동생이 되고, 나의 사랑이 다른 이의 사랑이 되며, 귀족이 하인이 된다. 그렇게 성별과 정체성, 신분의 전도가 왁자지껄한 축제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르시노 공작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오빠가 죽은 후 깊은 슬픔에 잠겨 바깥출입조차 하지 않고 있던 올리비아 아가씨가 그 사랑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사랑 고백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자 공작은 실의에 빠져 이렇게 한탄한다.     

        “음악이 사랑을 살찌우는 양식이라면 계속해 다오.

         질리도록 들어 싫증이 나면 사랑의 식욕 또한 사라지겠지. 

         다시 한번 들려다오. 아스라이 사라지는 선율, 

         귓가에 감미롭게 들린다. 

         흡사 바이올렛 꽃 피는 언덕 위의 미풍이

         몰래 꽃향기를 훔쳐 싣고 오는 것 같다. 

         (음악이 멈춘다.)

         오 사랑의 정령이여, 그대는 어찌 그리 변덕스럽고 새로운가.

         바다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어느 것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니,

         아무리 가치 있고 훌륭한 것도 

         한 순간, 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변하고 마는구나!    

         사랑의 환상은 변화무쌍,

         참으로 허황한 것이로구나!      (오르시노 공작,  1막 1장)     

  사랑에 빠진 연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울고 웃으며,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고 간다.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광대 터치스톤의 말처럼 “세상사가 덧없는 것처럼, 사랑을 하면 모든 사람이 덧없이 어리석어지나 보다.” ‘한 여름밤의 꿈’에 등장하는 오베론 왕의 시종인 요정 퍼크는 “시인과 미친 사람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상상력이 풍부하죠.”라고 말한다. 미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랑은 병이라고 하나 보다. 하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파는 강박증 증세를 보이는 사람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니 사랑은 정녕 질병인 모양이다. 1막 5장에서 올리비아는 사랑을 ‘역병’이라 부른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공작은 응답 없는 사랑에 애태운다, 그렇게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공작에게 광대는 이런 노래를 불러준다.    

        “오라, 오라, 죽음이여, 슬픈 편백나무 관속에 나를 뉘어다오. 

         끊어지라, 숨이여. 매정한 아가씨 손길에 이 목숨이 끝나는구나. 

         마련해 다오, 흰 바탕 수의에 주목나무 장식을...... 

         아, 말없이 묻어 다오. 변함없는 사랑의 슬픔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게 해 다오.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죽음과 같은 아픔과 슬픔을 준다. ‘십이야’의 가장 뚜렷한 주제는 낭만희극의 핵심인 사랑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아픔은 극복된다. 원하는 사랑을 가질 수 있어서,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어서 그 슬픔은 기쁨이 된다. 그렇게 낭만희극은 끝을 맺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쌍둥이 남매 비올라와 세바스찬. 그들은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난다. 그들이 탔던 배는 침몰하고 두 사람은 서로 간의 생사를 모른 체 표류한다. 그러다 쌍둥이 여동생 비올라는 공작의 나라 일리리아로 흘러온다. 사랑의 고통으로 물든 나라, 혼돈의 땅에 홀로 던져진 비올라는 남성의 복장을 하고 세자리오라는 이름으로 공작의 시종이 된다. 낭만희극 특유의 ‘복장 전도’이다.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처럼 그녀의 남장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나타낸다. 또한 귀족의 딸이었던 그녀가 공작의 하인으로 변화되는 신분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열두 번째 밤, 그곳 일리리아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랑의 고통은 세자리오로 변장한 비올라에게로 옮아간다. 비록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와 고상한 기품으로 공작의 총애를 받는다. 공작은 그(녀)에게 올리비아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맡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올리비아에 대한 공작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감동한 세자리오가 그에게 흠모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남장 여인이었던 그가 공작을 사랑하게 된 것은 동성애적 분위를 일으킨다. 더구나 그 역할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소년에게 맡겨졌을 것이므로 결국 관객들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렇게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이 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장 전도에 따른 성적 정체성의 문제는 이 극의 내용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할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이 중요한 것이다. 공작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의 시종일 뿐이었다. 자신의 참모습을 밝힐 수 없었던 세자리오(비올라)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죠.

         가슴에 숨긴 사랑은 꽃송이 속에 숨은 벌레처럼

         장밋빛 그녀의 뺨을 갉아먹고 있었죠.  상념에 병들어

         야위고, 샛노란 수심에 잠겨

         마치 인내의 상(像)처럼 슬픔을 악물고

         웃고 있었죠. 이런 게 사랑 아닐까요? 

         남자들은 말도 많고 맹세도 많지만, 실제로는 

         진실보다는 겉치레가 많아요. 맹세만 한다고 

         사랑이 증명되지는 않으니까요. “     (세자리오, 2막 4장)    

  가슴속에 숨긴 사랑 때문에 그녀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그리고 무심한 올리비아에게 헛된 구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공작에게 은연중 원망을 늘어놓는다. 과연 세자리노는 다시 비올라가 되어 공작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랑은 기대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공작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세자리오에게 올리비아가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공작의 하인에게 귀족 가문의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 그것이 셰익스피어 시대 무대 위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연극이 주는 자유와 파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예술을 경시하였다.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을 이데아라 불렀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도 같은 존재, 우리는 그 이데아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예술이란 것은 또다시 그 현실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게 예술은 추구해야 할 이데아와 우리를 더 멀리 갈라놓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나의 공화국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라 함은 곧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플라톤은 예술이 우리의 정신을 혼탁하게 한다고 믿었다. 예술에 대한 서양 역사의 첫 언급은 그렇게 냉담한 것이었다. 한편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철학적 배경 외에도 플라톤이 예술을 경원한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무너진 것은 그리스의 민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층계급의 그들이 자신의 조상을 탄핵하여 정치적 몰락을 초래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을 미워했다. 힘없는 그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귀족들의 정치를 비판하는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 군중들이 모이는 곳, 모여서 소리치고, 흥분하고 집단적인 힘을 발휘하는 곳. 그곳이 바로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이었다. 더구나 그 연극은 허구를 가장하여 질서를 무너뜨리고 계급을 전복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예술을, 연극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중세 이후 부활한 연극이 새로운 사회적 경향으로 막강한 영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지배계급들은 늘 연극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생겨난 연극에 대한 영국의 검열제도도 그러한 연극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지배계급들의 통제 수단이었던 것이다.   

  신분의 전복과 더불어 앞서 얘기한 성적 정체성의 혼란 역시 당시의 연극이 관객들에게 미친 영향 중의 하나였다. 올리비아는 여자인 세자리오를 사랑하고 세자리오는 남장을 한 채 남자인 공작을 사랑한다. 그리고 극의 후반 일리리아로 오게 된 비올라의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을 우정 이상의 감정으로 대하는 안토니오 등은 모두 이 작품에서 동성애적 분위기를 강화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적인 혼란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 즉 정체성 그 자체의 혼란인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대화를 떠오르게 한다.    

        올리비아: 잠깐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발 말해 줘요. 

        비올라: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리비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비올라:   그럼 옳게 생각하셨어요. 저는 보시는 대로의 제가 아닙니다. 

        올리비아: 당신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비올라:   그게 지금의 저보다 낫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고 싶네요. 

                  저는 당신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니까요! 

        올리비아: 아, 저 입에서 나오면 아무리 경멸스럽고 분통 터지는 

                  말이라도 아름답게 보이네. 감춰 두고 싶은 사모의 정은 

                  살인의 죄과보다도 더 빨리 드러나는구나.                   

  여자의 몸으로 남장을 하고, 남자의 모습으로 공작을 사랑하고, 그 모습으로 다시 올리비아의 구애를 받는다. 순간 세자리오이자 비올라인 그녀는 성별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그게 지금의 저보다 낫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고 싶네요. “ 사랑의 고통과 환상은 정체성마저 파괴하는 모양이다. 리어 왕도 결국 자식에 의해 사랑을 거부당하고 정체성을 상실했던 것이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공작은 올리비아에 대한 자신의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 서운함과 괴로움을 표출한다. 공작의 다음 대사는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열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남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의 가슴은 

         지금 내 마음에 고동치고 있는 열정을 감당할 수 없어.

         이토록 큰 내 마음속 사랑을 담을 여자의 가슴은 없으니까.

         포용력이 없어.

         아 아, 그들의 사랑은 식욕 같다고나 할까.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입맛의 작용이니까. 

         그러니 체하고, 물리고, 구토를 일으키기 마련이야.

         하지만 내 애정은 굶주린 바다와 같아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있다니까. 

         올리비아에 대한 내 사랑을 여자의 사랑에 비할 수는 없을 거야. “

                                            (오르시노 공작, 2막 4장)    

  셰익스피어는 어떤 특정의 이념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개념을 수용하므로 그중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희곡은 무수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 시인 존 키츠는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특징을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 불렀다. 모든 개념을 수용하지만,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주장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질서를 옹호하면서도 여성의 현명함과 뛰어난 미덕을 찬양하는 페미니즘도 받아들인다. 어떤 하나를 추구하여 다른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대와 장소, 성별과 남녀를 아울러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십이야’에서 셰익스피어는 ‘여자의 힘’을 강조한다. 여성만이 지니는 그 섬세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역경을 이기고 사랑을 쟁취하는 용기와 현명함.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분명 페미니스트이다. 리어는 가부장제의 대표처럼 보이지만 막내딸 코델리아의 진솔함과 희생 덕택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는 사랑의 환상을 넘어 현실을 딛고 선 실재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힘인 것이다. ‘십이야’의 비올라는 올리비아에 대한 열정에만 사로잡힌 공작의 사랑을 올리비아에게 전하는 가운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모습을 그린다.    

        “문 앞에 버들가지로 오두막을 짓고

         안에 있는 내 영혼을 불러내어

         무시당한 사랑의 변치 않는 표시로 노래를 지어,

         한 밤중에도 큰 소리로 노래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내어 산울림을 일으키고,

         재잘대는 바람에게

         ‘올리비아’하고 소리치게 하겠어요. 오, 당신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쉬지 못할 겁니다.

         날 가엽게 여기지 않는다면... “      (세자리오, 1막 5장)     

  세자리오-비올라의 이 대사는 공작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다. 은밀히 사랑하게 된 공작에게 자신의 사랑을 알아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올리비아에게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즉 자신에 대한 세자리오의 사랑 고백으로 여긴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어떤 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는가 보다. 세자리오의 이 애절한 사랑의 고백을 들으며 오늘날 우리의 사랑 표현을 생각한다. 사랑을 전화기의 문자로, 인터넷 메일로, 현대의 수많은 매체로 전달하고, 전달받는 우리에게 세자리오의 가슴속에 품은 그렇게 절실한 사랑의 표현은 존재할 수 있을까? 시대를 넘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소중히 간직되어야 한다. 사랑은 두 사람만의 소중한 감정이고 교감이고 경험이다. 그것은 영혼의 교류이다. 사랑의 고통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 당신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기억 속에 그 아련하고 애달픈 사랑의 기억은 남을 것 아닌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덜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 사랑할 수 없다면 혼자만의 사랑으로 만족하라.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슬퍼할 이유는 없다. 아직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니까.        

  ‘십이야’에 표현된 또 하나의 주제는 올리비아의 집사 말볼리오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그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집사였고, 주인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아의 집에 머물고 있던 자유분방한 그녀의 친척 토비 경과 그의 일행들은 말볼리오의 엄격함이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녀 마리아와 공모해 그를 골려줄 계획을 짠다. 즉 거짓 편지를 만들어 올리비아가 쓴 것처럼 말볼리오에게 전달한다. 그 편지에는 올리비아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가짜 편지를 받아 든 말볼리오는 엄청난 환희와 기대감에 흥분한다. 주인인 올리비아 아가씨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다니! 그는 아름다운 올리비아 아가씨를 차지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귀족의 신분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한 신분의 전환이 사회적 위계를 전복시키는 열두 번째 밤의 축제이고, 일리리아의 정신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 그의 환희는 한갓 꿈에 불과했다. 그것이 그저 토비 경 일행의 장난이었음을 알게 된 그는 좌절한다. 그 짧은 사랑의 꿈. 그 화려한 미래의 헛된 환상. ‘환상으로 사는 사람은 환멸로 죽는다.’고 했던가. 말볼리오는 어리석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헛된 꿈을 꾼 바보였다. 그러면 어떤가! 누군들 그 편지를 거짓으로 믿었겠는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분되는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것 때문에 환상에 빠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편지를 본 후 말볼리오는 자만에 빠져 올리비아에 대해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는다. 미친 것으로 간주되어 컴컴한 방에 갇히기도 한다. 결국 편지의 진실이 밝혀지고 말볼리오는 수치와 절망에 빠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광대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타고남이 잘날 수도 있고, 힘써 얻어 잘난 사람도 있고, 

         또한 남이 던져 주어 잘난 사람도 있지요 “      (광대, 5막 1장)     

  말볼리오의 잘못이 있다면 타고나지도, 힘써 얻지도 못한 주제에 남이 던져주는 이익만을 원했다는 점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간의 소중한 희망을 가지고 장난을 친 잔인한 사람들이다. 우리 주변에 토비 경과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속아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한 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잔인하고 거짓된 유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는지를 셰익스피어는 말볼리오를 통해 현대의 어리석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고. 진짜 올리비아의 편지가 언젠가 우리에게 전달되리라고. 그때 아름다운 아내와 부와 높은 신분은 얻지 못할지라도, 작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연극은 비올라의 오빠 세바스찬이 일리아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혼란의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은 남장한 비올라와 세바스찬을 혼동한다. 이른바 ‘정체성의 오인’(mistaken identity)으로 겪는 혼란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고통을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한 여름밤의 꿈’에서는 마법의 묘약을 가지고 디미트리우스의 사랑을 조종해 질서를 회복하고, 헬레나에게 사랑을 얻게 하지만, ‘십이야’에서는 같은 모습의 다른 인물을 등장시켜 잘못된 사랑의 방향들을 바꾸어 놓는다. 올리비아는 세자라오와 똑같은 모습의 세바스찬과 결합하고, 남장을 벗은 비올라는 공작의 사랑을 얻는다. 정체성의 오인이 오히려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사랑을 만나는 이치는 무엇일까? 세자리오와 똑같은 모습의 세바스찬을 선택한 올리비아의 사랑은 본질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외면에 의해 좌우되고, 공작은 사랑의 열정에서 벗어나 남자로만 알았던 비올라의 외면적 변화에 따라 사랑의 대상을 바꾼다. ‘십이야’ 속의 사랑은 그래서 어색하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합을 보여주기보다는 사랑이 외면이나 변화에 따라 옮겨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표면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올리비아가 되고 공작이 된다. 그러면서 진실을 찾아냈다고 착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의 마지막에 광대가 노래한다. 태어나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멍하게 취한 머리로 늙어가는 인생을 노래한다. 그렇게 삶의 진실은 외면의 현실 속에 묻혀 간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와 전복의 가능성 때문에 인생은 흥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변하는 세상이지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바람은 불고 여전히 비는 내린다.      

         그 옛날 어린 시절엔 

         헤이 호, 바람과 비

         생각 없이 놀아도 되었어. 

         날마다 비는 오시네.    

         하지만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헤이 호, 바람과 비

         깡패와 도둑을 막으려 사람들은 문을 닫아버렸지.

         날마다 비는 오시네.    

         가엽게도 아내를 맞게 되자

         헤이 호, 바람과 비

         허풍만으로 살 수 없더군.

         날마다 비는 오시네.    

         그리고 늙어 자리에 누워도

         헤이 호, 바람과 비

         멍하게 취한 머리는 여전하네.

         날마다 비는 오시네.     

                                    (광대,  5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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