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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04. 2020

뜻대로 하세요, 모든 건 마음에

셰익스피어 인문학: As You Like It

  동생이 형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다. 형은 깊은 숲속으로 은신하고 그 척박한 자연 속에서 회한의 삶을 산다. 인륜마저 저버리도록 만드는 권력은 오랫동안 문학의 핵심적인 테마였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왔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도 그러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인류 최초의 형제간 싸움은 성서 속에 등장한다. 카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가? 그 이유는 하느님이 동생을 더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한 그의 질투심 때문이었다. 살인이 저질러진 후, 하느님이 아벨의 행방을 묻자 카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제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인류 최초의 골육상쟁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공작은 형을 몰아내고 형의 나라를 차지한다. 당연히 배신과 증오, 복수의 비극이 벌어질만하다. 하지만 ‘뜻대로 하세요’는 희극이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낭만적인 희극이다. 권력을 잃은 형은 동생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속에서 숲속 깊은 곳으로 도피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몇몇 충신들과 함께 새로운 만족과 깨달음을 얻는다.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동지, 형제 여러분! 

         오랫동안 익숙해지니 이 생활이 겉모양만 화려한 저쪽 생활 보다 

         즐겁지 않소? 이 숲속이 간사한 저쪽 궁궐 보다 위험성도 덜 하지요? 

         여기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습니다. 

         사철의 변화에도, - 즉 난폭한 매질을 하듯, 얼음 같은 송곳니처럼, 

         겨울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몸을 물어뜯고 때릴 때, 나는 추위에 움츠리지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얘기하오. "이것은 허위가 아니다.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충고자들 이다."라고. 역경의 혜택이란 아름다운 

         것이오. 역경이란 옴두꺼비처럼 흉측하고 독살스럽지만 그 머리에는 

         귀중한 보석이 박혀있는 것이니까. 속세의 인간들과 떨어져 사는 우리의 

         생활이고 보면 나무에서 말을, 흐르는 냇물에서 책을, 돌에서 설교를 찾고, 

         만물에서 선(善)을 찾게 되는 것이오. 나는 이런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소.“

                                                       (전 공작, 2막 1장)    

  이 극이 희극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자신이 겪는 역경조차 교훈으로 여기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과 선을 이루려는 그의 마음이 이 극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용서와 화해의 극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의 마음에 왜 분노와 증오가 없었겠는가. 현실의 고통이 어찌 즐거울 수만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절망과 복수의 염원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렇듯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은 참으로 현명한 용서의 자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험세일즈로 27세에 억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Paul J. Meier)는 “용서는 가해자의 잘못을 잊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라고 말한다. 용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굳이 힘들여 애쓰지 말라. 용서(forgiving)는 그저 잊어버리는 것(forgetting)이다. 그 증오의 대상을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는 일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듯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고 용서하는 것은 신만이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그저 잊어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동생에게 배신당한 전 공작은 모든 것을 잊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해지는 법을 배운 것이다.   

  ‘뜻대로 하세요’에는 또 다른 형제간의 갈등이 그려진다. 형 올리버는 동생 올란도를 미워한다. 카인처럼 그를 시기한다. 그래서 임종의 자리에서 동생을 부탁하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는 자신보다 뛰어났던 동생을 죽이려한다. 그래서 공작의 성에서 벌어지는 무술 대회에 나간 동생의 상대에게 경기 중 그를 죽이도록 획책한다. 하지만 올란도는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한 여인의 응원을 받는다. 그녀는 로잘린드, 쫓겨난 공작의 딸로 원수인 숙부의 성에 머물고 있는 처지였다. 그녀는 왠지 마음이 끌리는 그에게 격투를 그만 둘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올란도에게는 응원의 소리로 들렸고 자신을 위하는 그녀에게 이끌린다. 살벌한 음모의 한 가운데에서 사랑의 씨앗은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권력을 찬탈한 공작은 늘 불안감에 빠져있었다. 그에게 로잘린드는 눈엣가시였고, 올란드가 전 공작에게 충성했던 귀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경계한다.   

  올란드가 무술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그의 형 올리버의 계획은 무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그는 또 다른 살인의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눈치 챈 집안의 늙은 하인이 그 사실을 올란도에게 알려준다. 위험을 깨달은 그는 집을 떠나 도망친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우연히 전 공작이 은신하고 있던 바로 그 숲이었다. 로잘린드도 숙부의 성에서 떠나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늘 자신을 경계하는 숙부의 곁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따뜻한 마음씨의 사촌 여동생 실리아가 있었다. 교활한 공작의 딸이었지만 그녀는 언니를 무척이나 따랐다. 로잘린드가 성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실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따라나선다. 형제의 싸움에 대비되는 자매들 간의 사랑. 그렇게 ‘뜻대로 하세요’에는 사랑과 화해의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이 향한 곳도 전 공작의 숲이었다. 올란도가 도망한 사실을 알게 된 올리버가 동생을 추격해 도착한 곳도 역시 그 숲이었으니, 그곳에 서로 다른 사랑과 증오를 품은 젊은 남녀들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이제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대가 된다. 그렇게 낭만 희극의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궁전과 숲. 그곳은 인공과 자연, 음모와 화해, 죄와 용서의 상반된 개념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이중적 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인간은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악에 빠진 순간에도 선을 갈구한다. 대비되는 두 곳의 장소는 삶의 이중성을 말해준다. 한 편의 연극처럼 인생은 그렇게 갈등 속에 전개된다. 그래서 숲속의 현자 제이퀴즈는 이렇게 말한다.    

        “온 세계가 무대이며 모든 남녀는 한낱 배우에 불과하죠. 각자 

         퇴장도 하고 등장도 하며 주어진 시간에 많은 역을 맡는 답니다.“

                                                       (제이퀴즈, 2막 7장)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라는 셰익스피어의 대표적 경구는 바로 이 대사에서 비롯된다. 셰익스피어는 상반되는 두 개의 세상을 무대로 만들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각각의 무대에서 연기하게 한다. 질투와 의심의 공간에서는 고통 받고, 슬퍼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자유와 무욕의 무대에서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떤 공간에서는 서로 질시하고 다투지만 또 다른 공간에서는 기꺼이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연기를 한다. 제이퀴즈는 숲에서 만난 한 바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보, 그 바보! 숲속에서 바보를 만났어요. 얼룩무늬 옷을 입은 

         바보를요....... 주머니에서 해시계를 꺼내 멍청한 눈으로 들여다보더니 

         아주 그럴듯하게 말 했어요. "열시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 수 있지. 아홉시였던 것이 바로 한 시간 전이니, 한 시간 뒤에는 

         열한시가 되겠군. 그러니 시간마다 우리는 여물고, 또 여물어 시간 마다 

         우리는 썩고 또 썩는 거야. 여기에 얘기의 열쇠가 있어"라고 말입니다.“

                                                  (제이퀴즈, 2막 7장)    

  낭만희극은 남녀 간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곳에는 사랑의 중요성, 개인의 정체성, 실재와 외면의 괴리 등 다양한 철학적 주제가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우리의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의 뒤에는 시간의 영속성이 있다. 짧은 시간을 살아가면서 앞의 것은 뒤에 오는 시간에 자리를 내어준다. 오해와 고통은 가고 화해와 기쁨이 온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온다. 그렇게 인생은 해피엔딩의 희극이 된다. 제이퀴즈가 만난 바보의 말처럼 우리는 현명해지는 만큼 타락해가는 것은 아닐까? 여물고 여물다 썩어버리는 낱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그 타락의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깨달음과 현명함을 회복한다. 그래서 행복해 지는 것, 그것이 희극의 결말이다.     

  실리아와 함께 궁을 떠난 로잘린드는 안전을 위해 남장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자주 사용되는 ‘복장전도’의 기법이다. 주로 여자가 남자로 변장하는 복장의 전도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로잘린드는 남장을 함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감춘다. 그럼으로써 실리아와의 관계는 동성애적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발전한다. 비평가들은 아무리 사촌 자매간의 우애가 두텁다하더라도 실리아의 로잘린드에 대한 애정은 친척 간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실 리 아 : 아버지가 큰아버지로부터 앗아간 것을 나는 애정으로 언니에게 

                    바칠 생각이야. 명예에 걸고 맹서 하겠어. 이 맹서를 어기면 나를 

                    괴물로 만들어 버려. 그러니까 장미꽃처럼 곱고 단정한 언니, 

                    명랑하게 살아. 

         로잘린드 : 이제부터 그러지.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자. 가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실 리 아 : 제발 그래요. 장난삼아 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안 돼. 장난삼아 사랑을 해도 얼굴을 붉히는 순진성을 

                    지켜 명예롭게 되돌아 와야지 그 이상의 사랑을 하면 안 돼. 

                                                                (1막 2장)    

  실리아의 대사에는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와의 사랑은 장난삼아 하라고 한다. 그 이상의 사랑은 안 된다고 말한다. 1막의 2장과 3장에서 그려지는 실리아의 로잘린드에 대한 애정 표현은 연인들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앞서 이야기한 로잘린드의 남장도 동성애적 측면의 해석을 낳는다. 궁에서 떠날 결심을 한 로잘린드와 그녀를 따라 함께 떠날 결심을 한 실리아의 다음 대사는 그러한 생각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로자린드 : 나는 보통 여자보다 키가 크니 완전히 남자의 복장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옆구리에 용감하게 단검을 차고 손에는 멧돼지 창을 

                   들고. - 마음속에는 여자의 공포가 숨어 있겠지만 - 밖으로는 

                   늠름하고 용맹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겁 많은 사내들이 허풍으로 

                   공포를 감추듯이 말이야.  

         실 리 아 : 언니가 남자면 나는 언니를 뭐라고 부르지? 

         로자린드 : 죠브 신(神)의 사동 이름보다 못한 이름은 안 돼. 

                   나를 개니미드라고 불러. 근데 나는 너를 뭐라고 부르지? 

         실 리 아 : 내 신세와 관계가 있는 이름. 실리아가 아니라 방랑자라는 뜻의 

                    애리이나 라고.      (1막 3장)    

  남장한 로잘린드의 이름 개니미드(Ganymed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소년이다. 그는 제우스의 눈에 들어 그의 애인이 되었는데 전통적으로 동성애의 신으로 알려져 왔고 남성들의 섹스 노예가 된 미동을 가리키는 영어단어 ‘catamite'의 어원이다. 대사 속의 죠브 신은 로마신화의 쥬피터를 가리키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한다. 로잘린드는 하필 왜 이 이름을 고른 것일까?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암시하려 하였는가? 셰익스피어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의 희곡 속에 등장하는 남성끼리의 우정은 남녀 간의 애정 보다 더욱 진하게 그려진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연가인 ’소네트‘에서 표현된 사랑의 대상은 남자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의 소네트 20번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아름다운 사내여, 모두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다른 사내들은 부러워 쳐다보고, 여인들은 마음을 빼앗기지요.

         그대는 분명 여자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

         하지만 신이 그대를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고

         그들이 당신을 차지할지언정, 사랑만큼은 내가 품게 해주세요.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표현한 사랑의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남성이 소네트 속에 묘사된 ‘검은 머리의 여인’(Dark Lady)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아픔도 그려져 있다. 그렇게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셰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에는 여배우가 없었고 따라서 여성의 역할은 아름다운 미소년들이 맡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극 중 여성이 남성복장을 한 것은 결국 원래의 남성으로 돌아간 것이고 그가 무대 위의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동성애적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동성애나 양성애와 같은 그런 성적 함의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성별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이 ‘뜻대로 하세요’의 테마를 이루는 용서와 화해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로잘린드와 실리아는 공작이 있는 아덴 숲으로 향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랜 동안 숲을 헤매던 그들은 한 양치기 노인을 만나고 그를 시켜 작은 목장을 구입한다. 궁을 떠날 때 넉넉한 재물을 갖고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숲속 생활이 시작된다. 한편 형의 추적을 피해 같은 숲으로 도망한 올란도는 우연히 공작의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는 궁에 두고 온 로잘린드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로잘린드를 예찬하고 그리워하는 시를 적어 숲 속의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걸어둔다.    

         “내가 쓴 노래. 거기 걸려서 나의 사랑의 증인이 되어다오. 그리고 그대, 

         세 번 관을 받은 밤의 여왕이신 달이여, 저 위 그대의 창백한 자리에서 

         그대의 정숙한 눈으로 나의 온 일생을 지배하는 여인 로잘린드를 

         살피소서. 아, 로잘린드! 이 나무는 나의 책이니 껍질에 나의 많은 생각을 

         새겨보겠소. 이 숲속의 모든 눈이 그대의 미덕을 도처에서 볼 수 있도록.“

                                                       (올란도,  3막 2장)                  

  그의 시는 남장한 로잘린드의 손에 들어간다. 그녀 역시 올란도에 대한 설렘과 그리움으로 가득하지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의 본심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 때, 숲 속에서 올란드는 남장한 로잘린드와 실리아를 만나게 되고, 로잘린드를 닮은 그 젊은 청년에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로잘린드는 그 사실을 모르는 올란도에게 자신을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말한다. 원래는 남녀이지만 남자와 남자로 만나는 이 두 연인의 모습으로 관객들은 동성과 이성의 경계 위에서 전개되는 묘한 사랑의 게임에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로잘린드는 왜 이런 사랑의 시험을 하고 싶었을까? 그녀는 사랑의 현실을 믿었다. 그 어떤 사랑도 환상 속에서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 위대한 사랑들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말한다.    

        “세상이 창조된 지 육천년이 되지만 지금까지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어요. 트로일러스는 크레시다를 사랑해 죽으려했지만 결국 그 사람은 

         그리스인의 철봉에 골통이 박살나 죽었어요. 그런데도 사랑의 표본이 됐죠. 

         히로와 사랑에 빠진 리안더도, 히로가 여승이 되기는 했지만, 무더운 

         여름밤이 아니었더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겠죠. 이 청년은 헬레스폰트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몸에 쥐가 나서 물에 빠져 죽었어요. 그런 걸 당시의 

         바보 같은 전기 작가들이 세스토스의 여승 히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 

         했어요. 모두 거짓이에요. 사람이란 해가 지나면 죽고 구더기의 밥이 되지만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어요.“     (로잘린드, 4막 1장)    

  로잘린드는 불멸하는 사랑의 주인공으로 묘사되어왔던 트로일러스와 리안더의 얘기를 꺼내어 그들의 죽음이 낭만적인 사랑 때문이 아니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크레시다와 히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는 올란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은 결코 환상이 아니고 현실임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열정과 환상에 빠진 사랑의 이상이 아니고 사랑의 현실을 추구한다. 올란도의 사랑이 그저 열정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굳건히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인가를 알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이 현실의 세계 속에 구현되는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등장하는 현명한 여인들이 그렇듯이 로잘린드는 정염에 사로잡혀 현실을 도외시하는 어리석은 남자의 열정을 거부하고 함께 현실을 헤쳐 가는 진정한 사랑을 이끌어내는 현명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편 올란도를 추적해 숲으로 들어온 올리버는 그만 거대한 뱀에게 몸을 졸린 채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다. 그때 올란도가 등장하고 그를 본 뱀은 올리버를 옥죄었던 몸을 풀고 사라진다. 하지만 굶주린 암사자가 정신을 잃은 올리버를 노리고 있었고, 올란도는 순간 갈등한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구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에 대한 증오보다는 형제간의 애정이 더 컸던 그는 사자와 격투를 벌인다. 사자를 죽인 올란도는 형을 데리고 공작에게로 간다. 그리고 사자와의 싸움으로 많은 피를 흘린 그는 정신을 잃기 전 형에게 자신이 로잘린드라 부르는 목장의 젊은이에게 피에 물든 수건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올리버는 동생에 대한 가책과 후회로 가슴을 치며 목장으로 찾아가 그 얘기를 두 자매에게 전한다. 그 순간 실리아는 올리버의 진실한 뉘우침과 고통에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그렇게 아덴의 숲에서는 또 다른 사랑이 잉태된다. 마침내 로잘린드가 정체를 드러내어 부상에서 회복된 올란도와 재회하고 실리아도 올리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공작의 숲은 새로운 사랑의 환희로 가득 찬다.     

  ‘뜻대로 하세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덴 숲에 들어오는 순간 변화를 겪는다. 아버지의 몰락을 슬퍼하고 숙부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했던 로잘린드는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랑의 전령사로, 그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버지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온 실리아는 새로운 사랑을 찾은 행복한 여인으로 변화한다. 동생을 죽이려던 사악한 올리버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으며, 형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에 불안과 증오심에 빠져있던 올란도도 죽음을 목전에 둔 형을 보는 순간, 따뜻한 형제애를 회복한다. 그렇게 공작의 숲은 변화를 창조하고, 모든 것에서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형을 배신했던 프레데릭 공작도 마찬가지이다. 숲으로 도망친 형에게 충성하는 귀족들과 자신을 버리고 떠난 딸 실리아에게 분노한 그는 군사를 일으켜 형과 그의 일행을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노 수도사를 만나 그를 통해 자신의 삶과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모든 것을 이전대로 돌리기로 한다. 전 공작도 동생의 뉘우침을 받아들이고 그를 용서한다. 이제 숲은 연인의 사랑 뿐 아니라 모두가 용서하고 화합하는 변화의 장소가 된다. 인간은 그렇게 변화하는 존재이다. 제이퀴즈는 인생을 7막 짜리 연극에 비유한다. 1막의 ‘아이’로 시작해, 학생, 연인, 군인, 재판관, 늙은 바보 그리고 마지막 7막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삶의 무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렇게 인간은 변화한다. 세월의 마법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변화를 초래한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늙어가면서 더욱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변화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일어난다면 인생은 그렇게 허망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뜻대로 하세요’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삶의 변화, 환상이 아닌 실재하는 사랑, 형제와 자매의 사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선이 승리하는 세상사의 이치 등 고전적인 테마들로 가득하다. 이제 우리의 선택과 깨달음만이 남는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최소한 어둡고 쓸쓸한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뜻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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