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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n 23. 2021

사랑했던 것에 대한 기억

박경리 :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 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That Old House

           by Park, Kyong-ri     


At the house

Where tens of jujube trees ailing from witches broom

Suddenly died all at once,

I lived for fifteen years.     


At that lonely house like an empty warehouse,

Where scops owls and rustic buntings sang at night

And the frogs croaked themselves hoarse

In early spring

I lived in there by myself.        


Fortunately the backyards were wide enough

To plant cabbage, red pepper, lettuce and green onions.

I lived with cats,

Attached to the house.    


At cold night when the moonlight streamed in

I used to be afraid,

Feeling as if I came to the extreme end of the world.

But I relied on

A piece of paper and a pen on the table,

Thinking of an expelled ancient historian.     


At that time, at that old house,

Always

There used to be wild animals roaring around,

Wolves and foxes,

Snakes and hyenas.

Now bitter time has passed

And I am old enough to relax myself.

I feel free and easy as all I have is to be thrown away.    


박경리 작가의 동명 유고시집 ‘옛날의 그 집’에 수록된 위의 시는 누구의 가슴속에나 있는 오래전 그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 옛날 동대문 밖 창신동의 적산가옥.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에 누워 위를 보면 커다란 서까래가 가로지르고 있었죠. 마루의 작은 사각의 나무를 들어 올리면 그 아래에서 오래된 흙냄새가 올라왔습니다. 부엌으로 난 안방의 작은 문을 통해 밥상이 들어오기도 했고, 마루와 부엌 사이에 작은 툇마루도 있었습니다. 마당을 사이로 두 개의 작은 방이 마주 보고 있었고, 안방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건넌방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개의 방에는 혼전의 삼촌과 막내 고모가 있었죠. 삼촌이 결혼한 후에는 그 방을 장손인 내가 초등학생임에도 홀로 차지했습니다. 마당 가운데 수도와 함께 펌프도 있었어요. 여름에는 그 수돗가에 놓여있던 큰 다라에 수박 한 덩이가 떠있던 모습도 선명합니다. 저도 그 집에서 15년을 살았죠.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좁은 골목으로 상여가 나가던 기억도 있습니다. 골목 끝 집 담 벽은 우리가 던진 야구공으로 움푹 파여 있었습니다. 빨간 벽돌로 잘 지어진 무당 집도 있었고, 은행장 집 앞마당에는 제법 큰 연못도 있었어요. 50년도 넘은 옛날의 풍경이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기억 속 옛집은 언젠가 홀로 살았던 외로운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뜨락에 채소를 심고, 고양이와 대화하며 정들었던 곳이었네요. 홀로 지낸 겨울밤은 무섭기도 했겠지만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시린 손으로 펜을 잡고 원고지를 채워가던 선생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선생은 거세되어 먼 곳에서 홀로 유배 생활을 하던 사마천이 생각나셨던 모양이지요. 글을 쓰는 것은 그렇듯 외롭고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밤이 되면 사방에서 으르렁 거리던 무서운 짐승들 사이에서 보낸 그 시절은 가고, 이제 버릴 것은 버릴 수 있겠다는 늙음의 안락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죠. 살아봐야 압니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외로운 일인지를. 당신이 이 밤, 잠들지 않고 쓰고 있는 글이 누구에게는 오래전 살았던 그 집을 떠올리게 할 겁니다. 행복했고, 불행했던 그 수많은 밤을 다시 불러줄 겁니다. 그리고 새 아침이 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솟아오르겠죠.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아련한 기억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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