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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n 22. 2021

몇 방울의 알코올에 기대어

전혜린 : 무제

무제

     전혜린     


몇 방울의 알코올..

그리고 내 세계는 새로워진다.

확 트이는 지평선, 흰 새벽, 닭 우는 소리,

솟아 흐르는 샘의 물소리로 그것은 가득 채워진다.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강렬하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 녹음, 대낮.

나는 나와 전 세계에 악수를 한다.

아무것도 나에게 불만이 없다.

마치 이 새 주정(酒精)을 담는 주머니가 낡은 것임을 잊은 듯.

아무 어둠도, 회의도 없이 피어나는 마음의 오후다.     


Untitled

     by Chun, Hye-rin     


A few drops of alcohol,

That makes my world refreshed.

It is filled with a vast view of the horizon, the highest peak of daybreak,

The sound of cocks crowing and a spring gushing out.

Suddenly intensely glaring green-ness and daylight comes into my sight.

I shake hands with myself and the entire world.

None complains of me,

As if it forgot a sack for new wine was too old.

This afternoon when my mind flourishes with no darkness and doubt.     


어느 날 오후, 아직 한낮의 밝음이 주변을 감싸고 있던 그날, 시인은 이른 낮술 몇 잔에 취기를 느낀다. 아무런 인습의 굴레가 없던 어린 시절 고향의 넓은 초원의 광활함, 헛간 쪽 닭장에서 들려오던 토종닭의 익숙한 울음소리, 빨갛게 달궈진 얼굴을 담그고 차가운 물의 손길을 느꼈던 샘물의 차오르는 소리가 취기 오른 시인의 눈가에, 귓전에 불현듯 다가선다. 가늘게 뜬 눈 안으로 쏟아져 오던 초록의 숲과 햇빛에 얼굴을 묻고 시인과 세상은 하나가 된다. 화해한다. 이 순간만은 누구도 나를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몇 잔의 알코올에 기대어 잊어왔던 시인의 허망한 일상쯤이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제목 없는 이 오후, 조금의 두려움도, 불안함도 없이 시인의 마음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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