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Jun 30. 2021

나 취했노라

백석 : 나 취했노라

나 취했노라

        백석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것과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오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I am drunk. 

         Paek-suk     


I am drunk. 

I am drunk by old Scottish whisky. 

I am drunk by grief. 

I am drunk by the idea of being happy and being unhappy.

I am drunk tonight by my empty life.     


나 젊은 시절의 낭만이 그립다. 호기롭게 마시고 친구와 어깨 짚고 노래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래서 나 또한 취한다. 독주에 취하고 그리움에 취하고 풋사랑에 취하고 여인의 향기에 취하고 지독한 고독에 취하고, 눈 오는 날 홀로 먼 길을 걸어오던 그 밤에 취하고, 헤르만 헤세의 수필에 취하고, 흥얼거리듯 읊조리던 셸리의 시에 취했다. 그렇게 취한 듯, 깬 듯 꿈길을 걸어왔다. 문학은 천국이고 지옥이었다. 쓰기보다는 말하기에 내 온몸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 코웃음 치던 시인의 시에 빠져 밤마다 무언가 긁적이는 초로(初老)의 내 몸에 아직도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것은 그렇듯 모든 것에 취했던 젊음에 대한 기억뿐이런가.     


나 취했노라

나 낡은 사진첩 흐릿한 추억에 취했노라

나 버리지 못한, 색 바래고 너덜거리는 책장의 냄새에 취했노라

나 기쁜 외로움에 취하고 

나 푸른 하늘 아래 가여운 모든 것에 취했노라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