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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8. 2020

실수 연발: 오해와 진실

셰익스피어 인문학: Comedy of Errors 

  하루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살아본다면 어떨까? 그것도 자신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말이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내게 자신의 남편 또는 부인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내게 돈을 갚겠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내게 빚을 갚으라고 채근한다. 물론 나는 돈을 빌려준 적도 돈을 꾼 적도 없다.

  오늘의 나는 갑자기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지난 시간 동안 나 자신이 배운 것, 겪은 것, 행동한 모든 것이 합쳐져서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아침에 나 자신을 변화시켜 전혀 다른 이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잊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 

  

  옛날 유럽에 시라쿠스와 에페수스라는 두 도시가 있었다. 두 도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로 적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 도시 사람이 다른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한다거나 하면 엄청난 벌금을 물거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어느 날 에페수스에서 이지언이라는 시라쿠스의 한 늙은 상인이 붙들린다. 법에 따라 처벌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는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에페수스의 공작은 처형 전에 그 노인에게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할 기회를 준다.

  이지언은 시라쿠스에서 나서 그곳에서 상인이 되었다. 한때 에피담덤이라는 곳으로 장사를 떠났는데 그곳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되자 고향에 있던 아내를 그곳으로 오게 한다. 임신 중이었던 그의 아내는 에피담덤의 여관에서 똑같이 닮은 아들 쌍둥이를 낳는다. 그런데 우연히 같은 날 옆방의 산모도 쌍둥이를 출산한다. 이지언은 가난한 산모의 쌍둥이 아이들을 사서 자기 아이들의 하인으로 키운다. 

  출산 후 그의 아내는 떠나온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다. 그래서 이지언은 식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뒤틀리기 시작한다. 가는 길에 엄청난 폭풍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선원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의 가족만 남게 되었다. 어떻게라도 가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작은 아들과 하인으로 키워질 아이를 돛에 자신과 함께 묶는다. 그의 아내에게는 큰 아들과 다른 하인 아이를. 그러나 거대한 폭풍 속에서 부부는 헤어지게 되고, 다행히 각각 다른 선박에 의해 구조되기는 했지만 그 후 가족들은 오랜 세월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살아야 했다. 쌍둥이 작은 아들 안티폴러스(시라쿠스의 안티폴러스)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와 형을 그리워했고 마침내 그와 함께 자란 하인 드로미오를 데리고 그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7년 동안 이지언은 작은 아들의 소식조차 듣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가 아들을 찾아 나섰고 모진 고생 끝에 에페수스에 도착했다가 지금의 처지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들은 공작은 이 늙은 상인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고 싶었지만 이미 내린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지언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어 벌금을 구해오도록 한다. 하지만 공작의 호의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에페수스에 아무런 연고도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명이 그렇게 잔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두 아들이 그들의 하인과 함께 모두 이곳 에페수스에 있었던 것이다. 쌍둥이 큰 아들(에페수스의 안티폴러스)은 바다에서 구조된 후 못된 선원들에 의해 엄마와 헤어져 팔려가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에페수스 공작의 삼촌에게 팔려가 공작에 의해 에페수스에서 키워진다. 공작은 안티폴러스가 무척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성장하자 군에 입대시키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자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을 시킨다. 그래서 그는 에페수스에서 부자로 살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두 형제가 모습도 이름도 똑같았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하인으로 키워진 아이들도 모두 같은 모습이었고, 이름도 같은 드로미오였다. 

  이후 두 쌍둥이 형제들의 이름과 모습에서 이런저런 오해와 실수가 이어진다. 그리고 한 바탕의 소동이 있고 난 뒤 이지언의 가족들이 상봉하게 된다. 어머니는 아들을 빼앗긴 뒤 수녀원에 들어가게 됐는데 이때는 수녀원의 원장이 되어 있었다. 결국 운명적으로 헤어진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되고 큰 아들 덕으로 이지온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흔히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한다. 남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되어서 하루만 살아본다면 그들의 행복, 고통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실수 연발로 살기에는 너무 짧은 것이니까.              

  


  ‘실수 연발’(Comedy of Errors)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쌍둥이 형제의 너무나 닮은 모습 때문에 생겨난 터무니없는 사건들이 에피소드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된 주제는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결국 하나가 되는 가족의 사랑이다. 풍랑으로 사랑하는 아내, 큰 아들을 잃어버린 이지온은 다른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선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였다.

  요즈음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고 한다. 부부의 애정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복잡하고 각박해져 가는 세태 속에서 퇴색하고 있다. 이지온은 늙고 무능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슬픔이 너무도 커 사는 것이 지겨운 인생이었지만, 그를 지탱해 온 것은 다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다니던 문법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 동생들을 위해 열네 살의 나이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후 런던에서 극작가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당시 다른 작가들로부터 ‘small Latin, less Greek’(그리스어도 못하고 라틴어는 더 못하는)이라고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는 오십도 채 되기 전에 극작을 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런던에서 번 돈으로 고향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을 구입하고 그는 시골 마을의 유지로 조용한 삶을 산다. 

  ‘실수 연발’은 셰익스피어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에이븐 강이 흐르고 아름다운 아든 숲이 우거진 고향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보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곳의 자연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묘사된 자연이었고, 그곳의 사람들이 작 중의 인물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형식주의 비평은 한계를 지닌다. 작품 외의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텍스트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문학을 이론의 체계로 성립시키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작가와 그의 삶,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수 연발’은 가족에 대한 끝없는 동경의 산물이다. 역경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만으로 살아온 이지온,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형을 찾아 나선 동생 안티폴러스, 그리고 수녀가 되어 잃어버린 남편과 아들들의 생존과 행복을 빌었던 어머니. 이들이 다시 만나 이루는 행복한 가정은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꿈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우리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문학이 그려내는 삶의 진실은 총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결국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성은 그래서 한 편의 문학으로, 한 명의 작가로 다 표현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것을 다 보려 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느끼고 수용하지만 모든 것을 다 풀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실수 연발’은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또 하나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가족의 사랑을 갈망하고 결국 가족의 결합을 완성시키고 있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삶의 궤적까지 통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주어진 대로 살아내다가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모일뿐이다. 셰익스피어는 가족이 어때야 하는 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키츠가 말한 셰익스피어의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 일지 모른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완성된 형태로 만들지 않는 ‘실현의 유보’(suspension of fulfillment)는 셰익스피어만의 능력일 것이다.            


  실수는 간혹 오해를 부르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과 남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던 쌍둥이 형제의 꼭 닮은 얼굴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 심지어 아내조차 남편의 쌍둥이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무심한 태도에 발끈한다. 에페수스의 안티폴러스(큰아들) 아내는 시동생을 남편으로 착각하고 그의 이상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보 왜, 오 도대체 왜

         당신은 스스로에게서 멀어지시는 거죠? 

         “스스로”라 말하는 것은 

         우린 나눌 수 없는 일심동체이니까

         저를 멀리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랍니다. 

         오, 제발 내게서 떨어져 나가려 하지 마세요!

                                       (아드리아나, 2막 2장)        

  멋진 말 아닌가?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남자의 무심함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무심함. 그녀는 이어서 남편의 죄는 곧 아내의 죄라며 남편의 외도를 캐묻고, 맞바람이라도 피울 기색으로 따지고 든다.  

         저는 불순한 얼룩으로 더럽혀집니다. 

         제 피에는 사음의 죄가 스며있어요;

         왜냐하면 우린 한 몸이니까 당신이 죄를 저지르면,

         저도 당신 몸의 독을 받아들여

         그것에 전염되고 결국 저는 매춘부처럼 되고 말죠.

         그러니 충실한 남편이 되어 당신의 침대로 돌아오세요.

         당신만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으면 저는 결백하니까요.  

                                       (아드리아나, 2막 2장)        

  아드리아나의 여동생도 진심으로 형부에게 충고한다. 바람을 피우더라도 들키지만 말라고!     

         외도를 하더라도 좋은 얼굴을 하고 다정하게 구세요. 

         악덕을 미덕의 선구자처럼 옷 입히고

         마음은 때 묻었어도 모습은 단정하게. 

         죄에게도 성자의 태도를 가르치고 

         나쁜 짓은 몰래하세요. 언니에게 알릴 필요는 없잖아요.

         도둑질을 자랑하는 도둑은 정말 멍청한 거죠.

                                             (루시아나, 3막 1장)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형부에게 해주는 처제의 조언치고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이다. 하지만 여자의 본성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니, 남성들이여 참고하라!       

         아, 불쌍한 건 여자지요. 뭐든 곧이들으니까요.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거든요.

         팔은 다른 사람에게 줘도, 소매는 보여주세요.

         여자는 남자가 하라는 대로 하니, 맘대로 움직여 봐요.   

                                            (루시아나, 3막 1장)            

  


  내가 세상의 한 방울 물이라면 어떨까. 그 작은 물방울이 거대한 바다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내 존재에 대한 느낌 아닐까? 이지언의 작은 아들 시라쿠스의 안티폴러스는 어머니와 형을 찾아 헤매는 자신의 모습을 한 방울 물이 거대한 바닷물 속에서 그 형체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으로 묘사한다. 참으로 절묘한 묘사이다. 이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더 절실히 표현한 것이 있을까. 우리는 한 방울 물에 불과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물방울들이 모여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것 아닌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대사이다.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 물이 

         그곳에서 자신의 동료를 찾으려고, 보이지도 않게 

         헤매다가 그만 제 모습마저 사라지고 말듯이

         세상에서 내가 그 한 방울의 물 같구나.

         어머니와 형을 찾으러 헤매다가

         끝내는 불행히도 나 자신을 잃고 말 거야. 

                                       (시라쿠스의 안티폴러스, 1막 2장)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위협 속에 살고 있다. 배신, 증오, 복수, 절망의 그림자들이 우리의 주변을 배회한다. 그 삶의 불안은 시대를 초월한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만의 어두운 그림자에 마주친다. 그리고 불안해한다. 오늘날 불안의 실체는 무엇일까. 척박한 삶일까, 존재론적 불확실성일까. 자신을 한 방울의 물로 비유한 안티폴러스는  에페수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 도시에는 사기꾼이 우글대지 않는가,

         눈을 속이는 날랜 야바위꾼이며,

         은밀한 비법으로 마음을 현혹하는 마법사들,

         영혼을 죽이고 육체마저 기형으로 만드는 마녀들,

         변장한 사기꾼, 씨부렁거리는 돌팔이들,

         그런 건달들이 우글대지.  

                             (시라쿠스의 안티폴러스, 1막 2장)    

  에페수스의 사기꾼, 야바위꾼, 마법사와 마녀들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을까.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위협과 불안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은 에페수스와 무엇이 다른가?  

  

  에페수스의 안티폴러스는 시련 속에서도 행운을 얻어 안락한 삶을 누린다. 그의 아내 아드리아나는 활달하지만 시기심이 많은 여자이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대사이지만 그녀는 삶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냉소적이면서도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남의 고통을 위로하듯 나의 고통을 위로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역경에 멍든 비참한 사람이

         울고 있으면, 누구나 달래게 마련이지만,

         그만큼의 고난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면

         남 못지않게, 아니 남 이상으로 비탄에 빠지게 되지. 

                                         (아드리아나, 2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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