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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7. 2020

끝이 좋으면 다 좋아:
과거는 과거로

셰익스피어 인문학: All's well that ends well 

  프랑스 로살리온 지방에 버트람이란 젊은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백작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토지와 작위를 물려받아 새로이 로살리온의 젊은 백작이 된 사람이었다. 버트람의 아버지는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친구였다. 백작의 죽음을 알게 된 왕은 그의 아들을 왕궁으로 부른다. 친구의 아들을 곁에 두고 돌봐주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남편을 잃고 혼자된 그의 어머니는 아들마저 슬픈 마음으로 떠내 보내게 되었다. 

  버트람이 왕궁으로 가게 된 것을 슬퍼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뿐이 아니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백작의 집에서 살아왔던 헬레나라는 처녀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버트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 유명한 의사들도 왕의 병을 치료하지 못해 그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한편 헬레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구실로 왕궁으로 들어갈 궁리를 한다. 버트람의 어머니는 헬레나가 궁정으로 가려는 이유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헬레나의 성품과 현명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을 따지지 않고 헬레나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헬레나는 부인의 환송을 받으며 왕궁을 향해 출발한다. 하지만 시골 처녀에게 왕의 치료를 맡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나는 아버지의 비방을 내세워 마침내 왕을 치료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왕의 병이 낫지 않으면 그녀는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치료에 성공하면 그녀가 원하는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상은 다름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남자와 왕의 명령으로 결혼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헬레나의 치료를 받은 왕이 병에서 회복된다. 왕은 약속대로 헬레나에게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 헬레나는 버트람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생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버트람의 태도는 냉담했다. 그는 한 번도 헬레나를 자신의 상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결혼이 다른 사람의 강요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버트람의 태도는 이해할만한 것이었지만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버트람은 헬레나에게 궁전을 떠날 허락을 얻어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허락을 얻자 그는 헬레나에게 고향인 로살리온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슬픔 속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헬레나는 이제 시어머니가 된 버트람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시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헬레나의 남편을 향한 그리움은 가실 줄 몰랐다. 그때 떠났던 남편의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그 편지에서 버트람은 자신의 아내가 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하나는 자신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가족의 반지를 얻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헬레나는 집을 떠나 플로렌스의 수도원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다. 사람의 만남은 가끔 운명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는가. 그녀가 도착한 플로렌스에 그녀의 남편 버트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플로렌스 공작의 군대에 들어가 몇 차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한다.

  남편을 만나고 싶었지만 헬레나는 그의 앞에 나설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친절한 과부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머물렀는데 그녀를 통해 남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놀랍고도 실망스러운 것은 남편 버트람이 하숙집 주인의 딸 다이애나를 마음에 두고 그녀를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는 다이애나에게 사랑의 징표로 자신의 반지를 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헬레나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숙집 주인과 딸에게 자신이 버트람의 아내임을 밝히고, 그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다이애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헬레나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측은히 여겨 그녀를 돕기로 결정한다. 모녀의 도움으로 헬레나는 다이애나로 가장하여 남편과 하루 밤을 보내게 된다. 그녀를 다이애나로 알고 있던 남편의 사랑 고백은 얼마나 달콤했었던지!  

  그때 버트람에게 헬레나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이 전해지고 그는 프랑스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리고 헬레나와 다이애나 모녀도 은밀히 그의 뒤를 쫓는다. 한편 헬레나의 죽음을 전해 들은 왕과 귀족들은 그녀를 애도하며 버트람의 냉담함을 원망한다. 그리고 버트람이 왕을 알현하는 순간 왕은 그의 손가락에 헬레나의 반지가 끼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 반지는 왕이 헬레나의 치료로 목숨을 건지고 그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헬레나는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며 그 반지를 사랑의 표시로 버트람에게 주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의 앞에 다이애나 모녀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버트람이 다이애나에게 주었던 집안의 반지는 이미 헬레나에게 돌려주었고,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한 것도 헬레나임이 밝혀진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을 되찾는다. 그리고 헬레나의 자신을 향한 진실하고 절실한 사랑을 깨닫게 된 버트람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다. 

  

  절망의 순간에도 헬레나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지와 계략으로 아내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꾸민 계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편에 대한 간절하고 진정한 사랑과 그것을 얻고자 하는 인내와 노력의 결과였다. 비록 결혼은 왕의 힘이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헬레나의 진실한 사랑과 현명한 처신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진실한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참된 마음과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이 좋으면 정말 다 좋은 것일까? 결과보다는 과정을, 목적보다는 수단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말이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는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결말은 언제나 모두의 행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반지를 이용한 책략을 통해 결말을 유도한다. 또한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신분을 이용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는 기법도 사용한다. 셰익스피어가 대부분의 희극에서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이다. 

  그러나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새롭다. 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전혀 다른 여성상을 창조하고 있다. 여주인공 헬레나는 평범한 신분의 여성으로 자신을 거두어준 백작 집안의 후계자를 사랑한다. 신분의 차이를 깨닫고 있던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버트람을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존경하고 사모한다. 그러나 유명한 의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비방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최고의 자산이었고 그녀가 신분의 벽을 넘어 사랑을 쟁취할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버트람에 대한 사랑의 열정은 수줍고 소극적이던 헬레나를 완전히 새로운 여인으로 변모시킨다. 자신의 자산을 이용해 사랑하는 남자를 얻으려는 적극적이고 강인한 여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헬레나는 왕의 병을 치료하고 그 대가로 버트람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강요로 이루어진 결혼이 행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여성스러운 태도와 현명함,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은 변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여성의 미덕을 그대로 지닌 새롭고 강한 여성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모든 것이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만인지상의 위치인 왕만이 여성인 상황, 더구나 미혼의 여왕은 지극히 복잡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고 그만큼 정치적인 기반이 취약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사에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반세기에 가깝게 영국을 지배한 불후의 여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감은 어떻게 유지되고 해소될 수 있었을까? 끝없는 정치적 음모와 권력의 부침 속에서 어떻게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놓을 수 있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Althusser)는 국가가 국민을 통치하는 구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군대, 경찰, 법률 등을 이용한 억압적(repressive) 기구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 종교, 예술 등을 이용한 이념적(ideological) 기구였다. 물리적 힘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한편, 교육이나 예술을 통해 국민들의 생각을 조종한다. 물론 부정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이것들을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호하기 위한 기재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사실 문학과 예술이 지배계급을 위해 봉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절대적 왕권의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작가들은 의식하든 않든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천착하는 경우가 많다. 신역사주의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치적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내용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주장은 여왕의 정체성과 관련해, 남성과 여성을 아우르는 중성화 작업을 통해 여성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여왕은 여성이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 성적 차이와 무관한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성성을 약화시키려 한들 여왕은 여성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성 신하들로 둘러싸인 궁정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최대한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일화들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결혼과 사랑을 구실로 귀족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야사와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여성이 절대적 권력을 유지하던 시대에 현명하고 강인한 여성상의 창조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특히 헬레나는 기지를 동원해 자신을 버린 남편 버트람의 사랑을 되찾을 뿐 아니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세의 봉건주의가 쇠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에 나온 작품 치고는 획기적인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오샤가 현명한 여성상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남성 법관으로 변장하고 있었고, 상대가 유태인이었음을 고려할 때 특별히 새로운 여성상이라고는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끝이 좋으면 다 좋아’에서의 헬레나는 지극히 현대적이다. 셰익스피어는 시련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지키고, 여성의 미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성상을 헬레나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미덕은 아닐 것이다. 사랑, 헌신, 인내, 지혜를 지닌 인간상. 셰익스피어는 남녀나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간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헬레나는 미천한 신분을  뛰어넘어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당찬 여성이다. 그녀는 사랑을 얻기 위해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략을 쓰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연인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언제나 동경으로 남아 있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빛나는 별 하나를 사랑하여

         그 별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 것, 그분은 그렇게도 높은 곳에 계시니.

         ......

         사자와 부부가 되고 싶어 하는

         암사슴이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헬레나, 1막 1장)         

  

  사랑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사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마음속에 담아둘 수 없는 사랑이 있을까? 헬레나는 슬픈 사랑의 운명에 체념하지 않고 스스로 넘어야 할 장애를 극복하리라 결심한다.     


         하늘의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치유책이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거야. 운명을 지배하는 하늘이

         우리에게 자유로운 기회를 주기도 하니까. 계획한 일이 늦어지고 

         진척되지 않는 건 단지 우리가 둔하기 때문이야. 

                                                   (헬레나, 1막 1장)        


  헬레나는 죽은 아버지의 비방으로 왕의 병을 치료하고 사랑하는 버트람 백작의 부인이 되지만 그의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비탄에 잠겨 방황하던 그녀는 버트람이 다른 여자를 유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순간 그녀에게 또 다른 비책이 떠오른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이애나로 가장하여 남편의 사랑을 되찾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녀의 슬픈 죽음의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버트람의 무심함을 비난한다. 그중의 대사 한 구절.    


         우리의 삶은 선과 악이 함께 어울려 짠 그물입니다. 

         우리의 결점이 미덕을 채찍질하지 않는다면, 미덕을 자랑 삼을 수 있겠죠.

         그리고 미덕으로 위로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악은 절망하고 말 겁니다.

                                              (귀족 1, 4막 3장)         

  

  버트람의 무심함은 진정한 사랑을 외면하는 잘못이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빛과 암흑이 공존하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밝거나 어두울 수만은 없는 것이어서 그나마 우리는 좋은 결말을 기대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영원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우리의 추억은 슬프다. 삶의 끝이 언제나 희망이기를 갈망하지만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잃어버린 것을 찬양하는 것은 

         기억을 더욱 뼈저리게 할 뿐이오.

                                          (왕, 5막 3장)                                          

  

  국왕의 말처럼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대로 두도록 하자. 어차피 ‘시간의 발걸음은 아무런 소리 없이 살며시 다가오는 것’이니까.(The inaudible and noiseless foot of Time. 5막 3장) 언젠가 끝이 있다면 ‘쓰라린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더욱 달콤한 것만을 환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The bitter past, more welcome is the sweet. 5막 3장)                         

     


  헬레나의 현명함은 병든 왕과의 대화 속에도 드러난다. 그녀의 치료에 회의적인 왕에게 그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이 기적처럼 일어난다고 말한다. 왕을 설득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녀의 믿음이고 힘이다. 신분의 차이와 무관심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황에만 의존하지 않고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 도전한다.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그리려는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 거대한 홍수도

         하찮은 샘에서 일어나지요, 거대한 바다가 마른 것은

         훌륭한 분들이 부정한 기적이 일어나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측은 흔히 틀리게 마련이죠. 가능성이 커 보이던 곳에서 

         가장 자주요. 그리고 가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곳에서 

         자주 일이 적중하기도 한답니다.   

                                             (헬레나 2막 1장)    


  다이애나로 가장하고 남편과의 하룻밤을 계획한 헬레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남성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계략도 불사하는 헬레나는 다이애나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남자의 본성을 이용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하려는 헬레나는 단호하다. 그리고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한다. 결국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니까. 과정은 어떠해도 상관없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니까. 하지만 명심하라. 헬레나의 경우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 수단이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남자들이란 참 이상해!

         욕정에 정신이 팔려

         칠흑 같은 밤을 더럽히면

         미워하는 사람도 그렇게 애무할 수 있으니 말이죠. 

         욕정은 있지도 않은 것을 위해 싫어하는 것을 희롱한답니다.  

         .............

         자 출발합시다.

         마차는 준비됐어요.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소생할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죠. 끝은 언제나 왕관과 같아요.

         과정이 어떻든 끝은 명예인 거죠. 

                                               (헬레나 4막 4장)    

  

  헬레나의 이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녀의 확신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헬레나처럼 시련과 고난을 사랑으로 극복할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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