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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4. 2020

심벌린: 사랑을 시험하지 마세요

셰익스피어 인문학: Cymberline

  우리는 가끔 누군가를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가 진정으로 날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내 친구는 진심으로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일까?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어서, 할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을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일 뿐이니까.  

  

  ‘심벌린’은 사랑하는 아내의 정숙함을 시험한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브리튼의 왕 심벌린은 사별한 왕비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첫 딸 이모젠을 제외하곤 두 아들을 어린 시절에 이유조차 모른 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린 딸을 키우던 심벌린 왕은 새 왕비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녀는 못된 계모였다. 그녀는 왕비가 되기 전에 클로튼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는 이모젠과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모젠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심벌린 왕의 보살핌으로 궁전에서 자라난 포스투머스라는 젊은이였는데 두 사람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부부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둘만의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왕비가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일러바치자, 결국 포스투머스는 궁전에서 추방된다. 

  두 사람의 이별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운명을 탓하며 그들은 사랑의 징표로 반지와 팔찌를 나누어 갖는다. 포스투머스는 로마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로마에서 알게 된 이아키모라는 자가 포스투머스에게 부부의 사랑도 오래 헤어져 있으면 변하게 되어있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모젠의 정숙함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던 포스투머스였지만 계속되는 이아키모의 도발에 그와 내기를 건다. 결국 이모젠의 사랑을 시험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심벌린의 궁전을 찾은 이아키모는 이모젠의 환영을 받는다. 남편의 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이모젠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이아키모가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구애를 하자 이모젠은 단호히 그를 거부한다. 계속된 구애에도 이모젠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던 이아키모는 계책을 꾸민다. 이모젠의 하녀들을 뇌물로 매수해 어느 날 밤 그녀의 방에 들어간 그는 이모젠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다. 목에 있는 점까지. 그리고 포스투머스에게서 받은 팔찌를 훔쳐낸다. 

  로마로 돌아온 이아키모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과 팔찌를 이용해 포스투머스를 절망에 빠뜨린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그는 좌절하고 그만큼 이모젠에게 증오를 품게 된다. 남의 사랑을 단지 호승심에서 파괴한 이아키모는 얼마나 야비한 사람인가! 포스투머스의 심정은 어땠을까? 영문도 모르고 이모젠은 부정한 여인이 되고 만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포스투머스는 이모젠에게 거짓 편지를 보낸다. 그녀를 보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브리튼으로 돌아가려 하니 밀포드 헤이븐이라는 곳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인 피사니오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 부정한 아내에 대한 배신감은 이렇듯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모젠의 정숙함을 믿고 있던 피사니오는 그 사실을 이모젠에게 알리고, 남장을 하고 남편을 찾아가도록 말한다. 그리고 포스투머스에게는 이모젠을 살해했다고 보고한다. 남편이 자신을 해치려 하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는 자신의 정숙함과 남편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고 싶었기에 남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웨일스의 거친 자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내 한 동굴 앞에 이른다. 그곳에는 다른 이들의 계략에 빠져 브리튼에서 추방된 벨라리우스라는 귀족이 그의 두 아들 기데리우스와 아비라구스와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벨라리우스가 추방을 당하면서 심벌린 왕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어린 두 아들을 납치해 자신의 아들인 양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남장한 이모젠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한편 계모인 왕비의 아들 클로텐이 이모젠의 뒤를 쫓아 그곳에 나타나지만 기데리우스와의 결투 끝에 죽고 만다. 그때 시저의 로마군이 조공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브리튼을 침공한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벨라리우스와 두 아들은 용감하게 싸운다. 한편 이태리로 추방되었던 포스투머스도 로마군과 함께 브리튼으로 오지만, 브리튼 군대의 옷으로 갈아입고 로마군과 싸운다. 마침내 로마군은 패퇴하게 되었으나 포스투머스는 아내를 죽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로마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브리튼 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로서 죽음을 당할 운명에 놓인 순간 주피터 신이 등장해 그를 구하고 모든 상황을 되돌려 놓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기법이 등장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넘어 절대적 힘에 의해 복잡한 상황을 풀어내는 기법이다. 결국 벨라리우스의 두 아들이 심벌린의 아들임이 밝혀지고, 사악한 왕비도 죽음을 맞는다. 포스투머스는 죽은 줄 알았던 이모젠과 재회하고, 이모젠의 기지로 그들 사이의 오해는 이아키모의 거짓에 의한 것임도 밝혀진다. 오랜 세월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아키모를 용서하고, 벨라리우스는 심벌린 왕의 사면을 받게 됨으로써 극은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거짓은 밝혀지고 진실은 승리한다. 

  

  이모젠과 포스투머스 사이의 불행은 못된 이아키모의 계략 때문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포스투머스가 아내의 사랑을 시험하는 일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중요한 것은 서로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상대에 대한 인식이 마음을 지배한다.”라고 한다.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멀리 떨어져 있고 세월이 흘러도 서로 간의 믿음과 결속이 변하지 않는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서양 사람들의 로고스에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것이 있다. 일종의 반대말 놀이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는 논리인데, 보통 선/악, 빛/어둠 하는 식으로 긍정적 개념이 왼쪽, 부정적 개념이 오른쪽에 위치한다.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다면 어느 쪽이 왼편에 놓이게 될까. 당연히 남성이 왼쪽이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 비해 수동적이다. 맥베스 부인이 예외라면 예외인데, 그녀의 악함과 강인함도 결국은 남편을 왕위에 앉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여전히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하위의 개념으로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그려지는 여성은 대부분 남성의 욕심 또는 오해로 인해 고통받거나, 혹은 자신의 결함으로 인해 악행에 빠진다. 

  ‘심벌린’도 예외는 아니다. 심벌린 왕의 딸 이모젠은 착하고 현명한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아버지에 의해 연인과 헤어져 고통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연인이 악당의 계략에 속아 사랑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심지어 그녀를 죽이려 한다. 물론 그를 속이고 함정에 빠뜨린 인물도 남성이다. 

  다른 한 편으로 여성이 욕심이나 그릇된 판단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모젠의 계모인 심벌린의 새 왕비는 본래 욕심이 많고 악한 심성의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이모젠을 모함하고, 그녀의 사랑을 빼앗고, 심지어는 포스투머스의 충직한 시종 피사니오 마저 죽이려 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고통받고 슬픔에 빠진 여성을 가장 고귀한 인간성의 표본으로 그려낸다. 이모젠은 사랑하는 남자의 터무니없는 오해로 시련을 겪지만 자신의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상황에 대한 판단력 또한 뛰어나 마지막 순간 악당 이아키모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자신의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얻게 된 사연을 자백하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책략으로 뒤틀어진 상황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고통받는 여성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 면에서 셰익스피어를 능가할 작가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작품 속 여성은 아름답지만 나약하고, 현명하지만 수동적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여성의 내부에 존재하는 강인함, 즉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강렬하고 능동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페미니스트였다.   

  

  195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억눌린 여성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후 페미니즘은 이항대립의 로고스를 해체하여 남성 우위의 인식을 전도하려는 철학적 성향을 띄게 되고 궁극에는 남녀 간의 대립이 아닌 상생의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여성이 남성과 구분되는 자신들 만의 장점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남녀의 차별이 없고 대립이 없는 화합의 세상을 이루어내는 방향성을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해체주의적 페미니즘 이론은 결국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대한 문학적, 철학적 이론화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의 희극에서 여성들의 고통은 조화와 평화를 위한 대가였다. 그리고 남성들의 자기중심적이고 어리석은 판단은 남성 중심의 편향된 세계관에 대한 신랄한 풍자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만대의 작가라고 부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성의 본질을 파악하는 힘,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개념에 대한 명철한 비판, 그것이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의심의 감정은 정말 통제하기 어렵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한 의심은 경계심만을 높일 뿐이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 친구, 아내, 형제에 대한 의심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괴롭히고, 심지어는 더 큰 악의를 만들어낸다. 사랑하여 결혼한 사람을 아버지의 반대로 떠내 보낸 여인, 그리고 그 떠나간 남편의 의심으로 버림받은 여인, 그녀가 심벌린 왕의 딸 이모젠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포스투머스는 이별의 순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정표를 교환한다.    

         이모젠:

         ... 보세요, 내 사랑;

         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제 어머니의 것이에요. 이것을 받아주세요. 

         하지만 이 이모젠이 죽어 다른 부인을 얻기 전에는 

         꼭 지니고 계셔야 해요.         

         포스투머스:

         ... 나를 위해 이 팔찌를 끼어주오. 

         이것은 사랑의 수갑이요. 나는 이것을

         이 아름다운 죄수에게 채워두겠소. 

                                   (1막 1장)        

  

  그러나 이아키모의 계략에 빠진 그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이 뿌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아키모가 아내의 방에서 훔쳐낸 팔찌를 그의 눈앞에 내밀자, 하늘에 두고 맹세했던 그의 사랑의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모젠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여자 없이 인간은 태어날 수 없단 말인가? 

         우린 모두 사생아일 뿐; 

         내가 아버지라 부르던 그 훌륭했던 분도 내가 만들어지던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뭐야; 누군가가 자신의 연장으로

         날 위조된 동전으로 만들어냈던 거지: 하지만 내 어머니는 

         순결한 다이애나 여신처럼 보였어. 그렇게 내 아내도

         비할 데 없이 순결하게 보였던 거야. 오 복수다, 복수!

         그녀는 내게도 함부로 몸을 허락하지 않고 

         관용을 빌곤 했어. 늙은 새턴 신마저 욕정을 일으키게 할 만큼 

         장미꽃잎처럼 사랑스럽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이야. 그래서 난 그녀를

         아직 햇빛도 보지 못한 눈처럼 깨끗한 여인으로 생각한 거지. 오, 이럴 수가!

                                            (포스투머스, 2막 5장)    


  우리 주변에는 이아키모와 같은 인간이 많다. 냉소적이고 야비하고 게다가 음탕하기까지 하다. 남의 가장 여린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상대를 위협하는 천박한 인간. 이런 인간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 하지만 이아키모와 같은 인간의 목표가 되면 피하기도 어려운 법이다. 그 불편한 벌레 같은 인간이 이모젠의 아름다움에 강한 색정을 품는다. 이 사악한 인간의 더러운 눈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을 것인가?  이아키모의 비열한 눈길이 이모젠의 모습을 훔친다.      

         그대의 침대에 어울리는 그 요염함! 싱싱한 백합,

         침대보보다 더 희구나! 한 번 만져 봤으면!

         한 번만 키스해 봤으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홍옥(紅玉),

         윗입술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키스를 하고 있구나! 그녀의 숨결이

         이 방에 향기를 뿌리고, 촛불마저 너울거리며 

         그녀를 향해 몸을 굽혀 몰래 그녀의 눈꺼풀 아래를 훔쳐보는구나.  

                                              (이아키모, 2막 2장)    

  

  이아키모의 계략에 빠진 포스투머스는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살해하려 한다. 그는 하인 피사니오에게 편지를 보내 부정한 그녀를 죽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 포스투머스는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것에 다름 아니다. 아내의 정숙함, 그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죽이고 말았으니까. 피사니오는 이 비극적인 불신의 늪을 허우적대는 그의 주인을 한탄한다. 무엇이 우리의 이성,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켜 그렇듯 잔인하게 만드는가. 이 폭력과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불신으로, 모욕으로, 파렴치함으로 얼마나 많은 믿음들을 살해하는가.    

         내가 구태여 칼을 뽑아들 필요가 있겠는가? 이 편지로

         이미 그녀의 목을 찔렀는데. 그렇지, 그 모략의 날은

         칼보다 예리하고, 그 중상의 말은 

         나일 강의 모든 독사들의 독 보다 더 지독하니     

         그 숨결은 저 역마 같은 바람을 걸터타고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퍼진다: (3막 4장)        

  

  의심은 과거의 모든 기억들까지 끌어내 상대를 비하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경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깨어진 사랑은 이제 무엇으로 다시 돌이킬 수 있을 것인가. 이모젠은 남편의 의심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맹세를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현명함으로 의심을 풀고 사랑을 회복한다.    

         이모젠:

         당신은 당신의 정숙한 아내를 왜 버리셨나요?     

         이제 바위처럼 단단히 당신께 매달려 있을 테니 

         다시 한번 내 던져 보세요. 

         (그를 끌어안는다.) 

         포스투머스: 

         내 영혼, 줄기가 다 마를 때까지 

         열매처럼 당신에게 매달려 있을 거요.      (5막 5장)        

  

  남자의 의심은 바보의 훈장이어서 떼어내기도 쉬운 법, 여성들이여 의심 많은 애인을 용서하고 한 번 더 안아주는 것이 어떨지. 열매를 달고 있는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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