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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3. 2020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과 우정

셰익스피어 인문학: Two Gentlemen of Verona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 혹은 바깥 세계로 나가 학식과 견문을 넓히는 것, 그 둘 중 젊은 시절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베로나 시의 두 젊은이 프로테우스와 발렌타인은 이 점에 있어서 서로 생각이 달랐다. 프로테우스는 어떤 가치보다 사랑을 우선한다. 줄리아라는 아가씨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발렌타인은 사랑보다 학문의 길을 택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젊음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더 넓은 세상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학문을 위해 밀라노로 떠난다. 늘 함께 다니며 깊은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자신들의 꿈을 위해 아쉬운 작별을 한다. 

  베로나에 남게 된 프로테우스는 끊임없이 줄리아에게 구애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의 자존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으로 애태우던 그에게 그의 아버지는 밀라노로 가서 새로운 세상을 배울 것을 명령한다. 한 번도 아버지를 거스른 적이 없던 프로테우스는 결국 베로나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의 마음을 태우던 줄리아는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자,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사랑의 징표로 자신의 반지를 선물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두 연인은 그렇게 쓰라린 이별을 한다. 

  밀라노에 도착한 프로테우스는 발렌타인의 소개로 밀라노 공작과 그의 딸 실비아를 만나게 된다. 놀라운 일은 그토록 연애를 혐오하던 발렌타인이 실비아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젊음은 사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학식과 경험을 주장하던 발렌타인이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사랑의 길에는 수많은 장애가 놓이기 마련이다. 실비아를 본 프로테우스가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잊은 채 실비아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만다. 친구의 연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오랜 우정을 배신하고 공작에게 발렌타인과 실비아의 관계를 알린다. 실비아를 투리오라는 신하와 결혼시킬 생각이었던 공작은 발렌타인을 밀라노에서 추방한다. 

  발렌타인이 떠난 후, 프로테우스는 비열하게도 실비아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발렌타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프로테우스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낀다. 한편 베로나에 홀로 남겨진 줄리아는 프로테우스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밀라노로 그를 찾아온다. 그렇게 네 사람의 연인들 사이에 엇갈린 사랑의 방황이 시작된다.

  밀라노에 온 줄리아는 남장을 하고 프로테우스의 하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에게 구애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런 줄리아에게 프로테우스는 실비아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를 전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이 정표로 준 반지까지 실비아에게 바치는 애인의 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절망에 빠진다. 옛사랑이 준 반지를 다른 여인의 사랑을 구하기 위해 주다니! 어리석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란! 

  한편 추방된 발렌타인은 우여곡절 끝에 산적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발렌타인을 잊지 못하는 실비아는 밀라노를 떠나 그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 산적들을 만나 위험에 처하고 그녀를 뒤따라온 프로테우스가 그녀를 구출한다. 그때, 발렌타인도 부하들이 한 여인을 납치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프로테우스가 실비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친구의 배신에 발렌타인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우스의 진심을 헤아리고, 실비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한다. 정말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자신을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가로채려 한 친구를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마저도 버릴 수 있을까? 실비아를 포기하겠다는 발렌타인의 말에 프로테우스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친다. 두 사람의 우정이 사랑의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그때 남장을 한 채 프로테우스의 시종 노릇을 하고 있던 줄리아가 그의 앞에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애끓는 마음을 전한다. 당황하고 놀란 프로테우스는 줄리아의 변함없는 사랑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다.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정도 사랑도 자기희생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진정한 사랑, 친구를 위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는 우정, 그것이 있어서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베로나의 두 신사’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으로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작가의 젊은 열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지와 같은 소품, 그리고 남장 여인의 설정이 극의 결말에 영향을 미치는 전형적인 셰익스피어 초기 희극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양한 수사법으로 앞으로 있을 사랑의 엇갈림을 전조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밀라노로 떠나기 전 프로테우스가 자신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줄리아에게 보냈던 편지는 읽히기도 전에 찢기는 운명이 되고, 본의는 아니지만 편지를 찢은 줄리아가 가책을 느껴 프로테우스에게 연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지만 그는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밀라노로 떠난다. 프로테우스의 조각난 편지에 쓰인 ‘사랑에 상처 입은 프로테우스’(Love-wounded Proteus)는 미래의 불운한 사랑에 대한 강한 이미저리(imagery)를 형성하고, 결국 프로테우스는 줄리아를 잊고 실비아에 대한 그릇된 정염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반어법적 극작 기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랑의 정표로 줄리아가 프로테우스에게 선물했던 반지는 깨어진 사랑의 재결합을 가능케 한 매개물이 되고 있다. 프로테우스가 줄리아를 통해 보낸 반지를 실비아가 경멸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줄리아에게 되돌아온 반지는 애인의 변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지키려 했던 헌신의 상징이었고, 그것을 통해 프로테우스와 줄리아의 사랑은 회복된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상징, 이미저리, 아이러니의 기법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의 현란한 수사와 함께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해주고 있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랑의 재결합과 더불어 ‘베로나의 두 신사’에 두드러지는 테마는 깨어진 우정의 회복이다. 사랑을 두고 다툰 두 친구의 우정은 발렌타인이 사랑하는 실비아를 친구 프로테우스를 위해 포기한다고 말함으로써 우정이 사랑보다 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프로테우스도 자신의 경박함을 후회하며 우정과 옛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데 이로써 사랑과 우정은 등가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또한 이는 남장을 하고 세바스찬이라는 시종으로 변신한 줄리아를 통해 새로운 아이러니로 탄생한다.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성전환의 모티브를 통해 남성 간의 우정과 이성 간의 사랑 그리고 여성(줄리아와 실비아) 간의 신뢰라는 관계의 구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비아가 프로테우스의 구애를 무시하고, 그가 보낸 줄리아의 반지를 거부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의 비열함에 대한 경멸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 대 여성의 결속이라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결국 두 쌍의 남녀가 보여주는 사랑과 배신 그리고 재결합은 남성 간의 우정과 여성 사이의 결속이라는 새로운 관계의 구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은 남녀를 떠나 인간 본연의 지고한 가치이다. 셰익스피어는 나약하게만 보이는 사랑과 우정의 감정이 권력이나 음모, 그리고 물질적 유혹보다 훨씬 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보다도 뜨거운 우정을 나누던 베로나의 두 신사 발렌타인과 프로테우스. 그들은 미래에 닥쳐올 배신과 사랑의 고통을 모른 채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발렌타인은 지혜를 얻게 해 줄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고, 프로테우스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발렌타인:

        사랑이 자네의 주인이 되었군. 사랑이 자넬 지배하게 되었으니 말일세.

        그러나 어리석은 사랑의 사슬에 묶인 자는

        현명한 사람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걸세.     

        프로테우스: 

        ...... 아름다운 꽃망울 속에

        그것을 먹고사는 해충이 살고 있듯이 그렇게 

        훌륭한 지혜 속에도 그것을 갉아먹는 사랑이 살고 있지.        

        발렌타인:

        ...... 철 이른 꽃봉오리가 

        채 피기도 전에 해충에게 갉아 먹히듯 

        젊음의 나약한 지혜는 사랑 때문에

        바보로 변하네...    

                                         (1막 1장)        

  젊음의 가치를 학문과 깨달음에 두었던 발렌타인은 뒤늦게 사랑에 빠져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리고 프로테우스에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냉소와 경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고백한다.      

        사랑을 조롱한 복수로 

        사랑이 열정에 들뜬 내 눈에서 잠을 몰아내고

        내 마음의 슬픔을 뜬 눈으로 지켜보게 하였네. 

        오 다정한 프로테우스, 사랑은 강력한 군주와 같아.

        날 완전히 굴복시켰네. 고백건대,

        이 군주의 징벌에 비할만한 비탄도 없거니와 

        그에 봉사하는 기쁨에 비할 것도 이 세상엔 없다네.

                                                (밸런타인, 2막 4장)        

  그러나 발렌타인의 사랑은 친구의 배신으로 상처를 입는다. 우정의 파탄은 프로테우스가 전에 사랑했던 여인 줄리아를 버리고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열(熱)이 다른 열을 몰아내듯이,

        혹은 못이 힘으로 다른 못을 밀어내듯이 

        그렇게 이전 여인의 기억은 

        새 여인에 의해 잊히는구나.

                                             (프로테우스, 2막 4장)        

  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 발렌타인은 프로테우스를 향해 쓰린 가슴으로 외친다.      

        누구를 믿겠는가, 오른손이 

        자기 가슴에 위증을 하는데. 프로테우스, 

        유감이지만 이제 더 이상은 자네를 믿을 수 없네. 

        자네 때문에 세상 전체를 불신하게 되었어.

        친구에게 입은 상처가 가장 깊은 법이지. 아 야속한 세월,

        모든 적들 가운데 친구가 가장 악한 적이라니!

                                                  (발렌타인, 5막 4장)        

  친구의 깊은 탄식에 프로테우스는 수치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번민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발렌타인은 기꺼이 자신의 사랑을 양보하겠노라 말한다. 순간 남자로 변장하고 옛 애인의 주변을 맴돌던 줄리아가 절망에 빠져 프로테우스를 향해 절규한다.      

        보세요, 그녀를. 당신의 맹세에 과녁이 되었고,

        그 모든 맹세를 가슴에 품었던 그녀를.

        얼마나 여러 번 맹세를 깨뜨려 그 마음속 뿌리를 찢어놓았던가!

        오 프로테우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줄리아, 5막 4장)        

  친구의 탄식과 옛 여인의 절규를 듣고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천박함과 비열함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옛사랑의 고귀함, 순수한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발렌타인과 함께 진정한 베로나의 신사가 된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과 후회. 오늘의 우리도 우정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 신사가 될 수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구애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더구나 한 때 서로 미칠 듯 사랑하여 그토록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사람이 사랑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빠져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면? 줄리아는 변심한 애인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만난 실비아가 프로테우스를 경멸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그의 실체 없는 헛된 사랑을 슬퍼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헛된 사랑의 그림자를 쫒고 있는 프로테우스를 원망한다.         

        자, 너 그림자야, 이 그림자를 들고 가라.

        네 연적이니까. 아, 이런 감각 없는 형상이 

        숭배되고, 키스받고, 사랑받고, 찬미된단 말인가.

        그이의 우상 숭배에 지각이 있었던들,

        실체인 나를 그것 대신 우상으로 삼을 것인데.  

                                              (줄리아, 4막 4장)    

  발렌타인은 우정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실비아를 프로테우스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실비아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녀를 프로테우스에게 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셰익스피어는 발렌타인의 터무니없는 양보를 통해 프로테우스의 회개를 끌어낸다. 우정과 사랑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깨달은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첫사랑 줄리아와 친구 발렌타인을 향해 참회한다. 그렇게 베로나의 두 신사는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되찾는다.

        오 하늘이여! 남자는 

        지조를 지켜야 완벽해지는 거야. 한 가지 실수가

        수많은 과오를 범하게 하고; 온갖 죄악을 저지르게 하거든:

        지조가 없으면 시작도 하기 전에 약속을 깨뜨리니까.

                                                (프로테우스, 5막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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