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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20. 2020

폭풍우: 용서와 화해, 자유와 굴종

셰익스피어 인문학: Tempest

  프로스페로와 그의 딸 미란다는 외딴 섬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에이리얼이라는 요정과 사악한 마녀 시코락스의 아들 칼리반의 시중을 받는다. 마법에 걸린 요정 에이리얼을 구해주고, 혼자 버려진 칼리반을 거두어준 것이 프로스페로였기 때문이었다. 

  프로스페로는 밀라노의 공작이었다. 그는 동생 안토니오의 계략에 빠져 공작의 지위를 잃고 섬으로 쫓겨난다. 형을 몰아낸 안토니오는 이후 나폴리 왕의 도움을 받아 밀라노의 권력을 차지한다. 섬에 온 프로스페로는 가지고 있던 마법의 책과 지팡이를 이용해 마법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그 마법의 힘을 이용해 거대한 폭풍우를 일으킨다. 그 폭풍우에 휩쓸려 배 한 척이 난파되고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섬에 오게 된다. 그들은 프로스페로의 동생 안토니오, 나폴리의 왕, 그리고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일행이었다. 프로스페로가 에이리얼을 시켜 폭풍우를 일으키고 그들을 섬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는 페르디난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페르디난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들은 원수였지만, 그 자식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프로스페로의 마법이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복수를 위해 폭풍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용서와 화해를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에이리얼에 의해 안토니오와 나폴리의 왕이 프로스페로 앞에 끌려온다. 그들은 이미 큰 시련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뉘우치고 있었다. 프로스페로의 마법과 그로 인해 일어난 폭풍우는 그들에게 죄의 대가로 고통을 겪게 했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회를 주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내 모든 이들이 모이자 프로스페로는 동생 안토니오와 나폴리의 왕을 이미 용서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용서를 자신의 관용이 아닌, 신의 섭리로 돌린다. 신이 만든 우주와 그 우주 속의 인간이 가져야 할 심성, 그것이 바로 용서와 사랑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스페로는 모든 일이 끝나는 순간, 마법의 책과 지팡이를 땅에 묻는다. 그것은 섭리의 실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신의 영역을 넘을 수 없음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였다. 사랑에 빠진 미란다와 페르디난드는 축복 속에 결혼하고, 프로스페로는 밀라노 공작의 지위를 되찾는다. 이렇게 ‘폭풍우’는 신의 섭리에 의해 모두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에이리얼과 칼리반은 어떻게 됐을까? 본래 에이리얼은 마녀 시코락스에 의해 나무의 갈라진 틈새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프로스페로에 의해 구출되고 그의 하인이 된다. 그는 모든 일이 끝난 뒤, 프로스페로에 의해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스페로의 마법이 가져온 또 하나의 기적은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스페로는 에이리얼을 악마의 마법에서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칼리반의 경우에는 더욱 감동적이다. 마녀 시코락스가 죽고 그가 섬에 혼자 남겨졌을 때 프로스페로는 그를 돌봐주고 가르치고 사랑을 베푼다. 시코락스의 마법으로 고통을 받았던 프로스페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그의 아들을 사랑으로 감쌌던 것이었다. 프로스페로가 땅에 묻었던 마법의 지팡이를 다시 꺼내어 신의 섭리가 다시 이 땅에 베풀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과 용서, 자유가 가득한 마법의 폭풍우가 일어난다면!

   


  ‘폭풍우’는 ‘겨울 이야기’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말기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 마음의 평화를 다시 회복하던 1607년 이후에 썼고,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 이후 펜을 꺾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고향은 스트래트포드 어픈 에이븐(Stratford-upon-Avon)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아든 숲이 우거지고 에이븐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표현된 자연의 모습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숲과 강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극작가는 사회적으로 대우 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혹의 시선과 경멸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셰익스피어는 오십이 채 안 된 나이에 극작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시골의 유지로서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폭풍우’에서 프로스페로가 마법의 책과 지팡이를 땅 속에 묻는 모습은 귀향을 생각한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폭풍우’는 형제 사이의 권력 다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역과 패륜으로 형 프로스페로의 자리를 차지한 동생 안토니오, 그리고 마법의 힘을 빌려 뒤틀린 운명을 다시 되돌려놓는 형, 권력 찬탈을 도왔던 나폴리의 왕, 그리고 그 왕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프로스페로의 딸. 그러나 그들의 다툼과 불행은 서로 간의 화해와 용서, 사랑의 완성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프로스페로는 그러한 결말을 신의 섭리라고 선언한다.(a wise overruling Providence) 인간의 모든 일은 신의 결정에 따른다는 운명론 그리고 선은 언제나 악에 승리를 거둔다는 결정론이 이 극의 결말이며 작가 셰익스피어의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폭풍우’에는 그 운명에 의해 억압되고 고통 받는 인물이 등장한다. 칼리반. 그는 마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요정 에이리얼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괴롭힘을 당한다. 또한 원숭이를 닮은 기괴한 외모로 그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스스로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칼리반은 그의 외모와 태생이라는 운명만으로 천대받았던 것이다. 이렇듯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정의와 사랑은 이유 없이 핍박받는 소수들에 의해 가끔 왜곡되고 훼손된다. 어떤 의미에서 칼리반은 소외되고, 고통 받는 많은 민중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3세계 문학이론가들에 의해 정립된 탈식민주의 이론도 이 점을 자주 지적한다. ‘폭풍우’ 속의 요정 에이리얼은 절대적 권력을 누리는 강자에게 기대어 약자를 핍박한다. 그는 프로스페로의 도움으로 마녀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의 시종이 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주인의 힘을 빌려 약자인 칼리반을 괴롭힌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한다. 결국 그는 프로스페로의 아량으로 자유를 얻지만 마지막 순간 프로스페로의 일행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권력에 의존한다. 

  그것은 마치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연상시킨다.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지만 투쟁을 통해 얻은 자유를 애써 회피하고 또 다른 속박을 추구하는 속성을 지닌다. 프랑스혁명으로 얻은 자유는 결국 더욱 강화된 권력에의 추종으로 사라진다. 혁명을 이끈 이들은 또다시 나폴레옹이라는 절대 권력자를 탄생시키고, 스스로 속박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폭풍우’를 쓰고 두 세기가 지난 후에 일어난 역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예언적이다. 아니 모든 문학은 예언적이다. 그것은 문학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속성과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칼리반은 에이리얼과 뚜렷이 대비된다. 프로스페로는 숲 속에서 칼리반을 발견해 그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문명의 혜택을 나누어준다. 그는 더 크고 발전된 문명의 시혜자이다. 그러나 칼리반은 결코 문명세계의 미덕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더 본질적인 자아의 뿌리,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의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상기시킨다. 침략의 희생자가 되었던 많은 민족들은 비록 미약하고 미개할지언정 그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본질적 존재의식이야말로 지켜야 할 가치였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정전(正典)으로 숭앙하는 서구의 문학이론가들에게는 불편한 것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문학에 대한 편향된 태도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에이리얼과 칼리반을 본다. 더 큰 힘에 의존하여 순종과 봉사의 미덕을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굴욕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애쓸 것인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있겠지만 두 부류의 인간,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폭풍우’는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동생에게 쫓겨나 오랜 세월 외딴 섬에 살고 있는 프로스페로 공작은 마법의 힘을 얻어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그는 추방된 자였으나 마침내 절대의 힘을 얻게 된다. 그는 거대한 폭풍우를 일으켜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를 펼친다. 프로스페로의 시종 에어리얼은 폭풍우에 휩쓸린 선원들의 외침을 전한다. “지옥은 텅 비고, 악마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Hell is empty/ And all the devils are here.)  

  마녀 시코락스의 저주로 소나무 토막 사이에 끼어 12년 동안 갇혀 있던 에어리얼은 프로스페로의 도움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그의 시종이 된다. 그리고 절대자 프로스페로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을 갈망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았나요? 일을 시키시려면 

         약속한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아직도 이행되고 있지 않은 그 약속 말이에요.

         ......

         저의 자유. 

                                          (에어리얼, 1막 1장)        

  하지만 에어리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복종과 보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칼리반은 에어리얼과는 달리 절대자 프로스페로에 대한 적의와 반역의 마음으로 가득하다. 자신에게 시혜를 베푼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에게 하는 그의 말은 그가 고마움과 복종보다는 증오와 저항을 미덕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가 나에게 말을 가르쳐주었지. 하지만 얻은 것이라곤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된 것뿐이야. 시뻘건 역병이나 덮쳐라,

         내게 너의 말을 가르쳐준 대가로.

                                       (칼리반, 1막 2장)         

  에어리얼과 칼리반의 상반된 태도는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이라는 두 극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시혜자에 대한 인식, 즉 프로스페로의 은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칼리반은 프로스페로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고 어머니의 섬―자기의 섬―을 차지했는지를 말한다.        

         이 섬은 내 것이야, 우리 어머니가 물려줬지.

         그런데 당신이 뺐었어. 당신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날 쓰다듬어주고 소중히 해줬지. 

         딸기가 든 물도 줬어. 그리고 내게 가르쳐 주었지.

         밤낮으로 타오르는 큰 불과 작은 불의 이름을.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어. 

         당신에게 이 섬의 모든 것을 알려줬지.

         맑은 샘물, 소금 구멍, 황무지와 기름진 땅:

         내가 왜 그랬는지!

                                             (칼리반, 1막 2장)        

  마치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 같은 이 대사는 이후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에 의해 자주 회자된다. 힘 있는 자는 시혜를 베풀었다고 하고, 힘없는 자는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하는 오늘의 세태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칼리반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얻지는 못한다. 프로스페로의 마법을 이기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했고, 프로스페로의 시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저항했던 칼리반 역시 복종과 헌신만이 자유를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되는 건지!    

  절대자 프로스페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룬다. 복수도, 용서도, 화해도, 사랑도 모두 그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자유를 갈망했던 에어리얼과 칼리반은 새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자신의 힘을 신의 섭리라고 선언했던 프로스페로는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는다.     

         ...나는 마법의 지팡이를 분질러,

         땅 속 깊은 곳에 파묻고,

         마술의 책은 측연도 닿지 않는 더 깊은 바다 속에

         잠기도록 할 것이다. 

                                     (프로스페로, 5막 1장)        

  그는 마법의 힘을 버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또 다시 섭리에 맡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현명한 독재자일지도 모른다. 프로스페로와 에어리얼, 칼리반의 관계와 각자의 태도를 통해 권력과 굴종, 저항과 힘의 한계 등을 보여주는 '폭풍우'는 그래서 권력자와 민중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프로스페로는 복수와 처벌 대신 용서와 화해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마음속에 사무친 원한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삶의 공허함과 신의 섭리를 깨달은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흥은 끝났어...

         구름을 인 탑도, 찬란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대지 자체도 

         그래 지상의 온갖 것은 다 녹아버려 

         이 허망한 연극처럼 사라지고

         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지. 우린 

         꿈처럼 허황한 존재일 뿐, 우리의 초라한 

         삶도 잠에 둘러 싸여 있으니까. 

                                            (프로스페로, 4막 1장)    

  용서와 화해는 진정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 섭리를 깨달은 것은 프로스페로 자신이었다. 그처럼 우리도 용서와 화해를 원하는 신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그 수많은 증오와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까?          

  어머니를 잃고 혼자 남겨진 칼리반은 프로스페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는 프로스페로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칼리반이 폭풍우로 표류한 선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프로스페로에 대한 증오심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운 힘에 기대려는 약자의 속성일까? 복종과 증오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힘 있는 상대에게 의존하여 굴욕감을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힘에 기대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칼리반은 헛된 기대에 들떠 소리친다.    

         이제 고기 잡는 둑은 만들지 않을 거야.

         장작도 나르지 않을 거야.

         명령을 받아도; 

         나무 그릇도 닦지 않고,

         접시 설거지도 하지 않을 거야.

         반, 반, 캘리반은 

         난 새 주인을 만났으니...어디 날 대신할 사람을 새로 구해보라고.

         자유다, 만세! 만세, 자유다! 

         자유, 만세, 자유다!

                                    (칼리반, 2막 2장)    

  칼리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는 새로운 힘으로 자유를 얻게 된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 힘의 논리에 굴복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칼리반처럼 저항으로 얻은 자유를 또 다른 굴종으로 반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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