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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Sep 28. 2021

소크라테스 인 러브

아스파시아, 그가 사랑한 여인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 진리, 사랑, 정의, 용기와 지식에 대한 그 무수한 사상을 쏟아낼 수 있었을까? 옥스퍼드 대학 고전문학 교수인  아먼드 댄구어(Armand D'Angour)는 2019년에 발행한 그의 책 ‘소크라테스 인 러브’(Socrates in Love)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 눈길을 끕니다.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가 매우 활동적이고 지적이었던 한 여인을 만났다는 것이죠. 그녀는 밀레투스의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댄구어 교수는 소크라테스가 그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철학의 역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거의 배제되어왔던 한 여성이 2500년 철학의 역사에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19세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 몽시오(Nicholas Monsiau)가 그린 그림 속에 소크라테스는 테이블 넘어 한 여인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관능적인 복장을 한 그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는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고 소크라테스 뒤로 잘 생긴 젊은 장군 알키비아데스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죠. 이 그림 속의 소크라테스는 늙고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석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년이 넘어서면서는 맨발에 산발을 하고 누더기 옷을 걸친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그림 속의 여인 아스파시아로부터 웅변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십여 년 넘게 아테네의 유력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정부로 살았죠. 비록 권력자의 애첩이었지만 그녀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림 속의 그녀는 웅변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페리클레스의 부장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키비아데스를 향하고 있는데, 그 젊은 장군은  양성애자였던 소크라테스와 한때 연인 관계였고, 플라톤의 대화 ‘잔치’에 언급되어 있듯이, 전장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죽음을 모면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을까요? 그의 행적을 기록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늙은 시절의 그였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도 한 때는 젊었고, 아스파시아라는 여인과는 동년배였지요. 남아있는 몇몇 소크라테스의 초상들, 전기 작가들의 이야기와 잘 알려지지 않은 글들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 못지않은 지적이고 용감한 전사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하는 말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대화록 ‘잔치’에서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한 현명한 여인’으로부터 “사랑에 대한 진리‘를 배웠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대화 속 그녀의 이름은 ’ 디오티마‘(Diotima)였습니다. ’ 잔치‘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녀의 생각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디오티마라는 여성을 허구의 인물로 여기고 있지요. 대화 속의 그녀는 여사제로 묘사되고 있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상가를 사랑의 신비 속으로 이끈 환상의 지혜를 상징하는 우화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댄구어 교수는 그녀가 바로 아스파시아였다고 주장합니다.    


아스파시아는 아테네의 지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페리클레스 가문과 인척 관계로 알려진 그녀의 조상들은 그녀가 태어나기 수 십 년 전 소아시아에 있던 밀레투스라는 그리스의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그녀가 기원전 450년 아테네로 이주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몇 년 뒤 아스파시아는 자신보다 20 여 살이 많은 페리클레스의 정부가 되었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희곡작가 클레아르쿠스(Clearchus)의 기록에 따르면 “아스파시아가 페리클레스의 첩이 되기 전 그녀는 소크라테스와 연인 관계였다”라고 합니다. 이는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가 페리클레스 가문에 속한 지식인이었다는 증거와 부합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연인은 아니더라도 소크라테스가 그녀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가 페리클레스의 후원 하에 있었음을 미루어볼 때, 그가 물질적인 성공을 멀리하고 영혼을 우선하는 삶을 지향하여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변화시킨 요인은 페리클레스의 연인 아스파시아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걸어왔던 젊은 시절의 궤적을 찾아 나선 적은 없었지요.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자료들이 너무 산발적이고 단편적이었으며, 그의 사상과 관련해 큰 관심을 끌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30대에 이미 아테네의 이름 난 철학자였으므로 이 시기에 그가 가졌던 철학적 개념들을 통해 이후 그의 사상적 변화를 알아보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댄구어 교수는 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이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와 이후의 소크라테스를 연결하는 고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아스파시아는 당대에 가장 영민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거의 15년 간 페리클레스의 정부로 살았기 때문에 그녀는 희곡 작가들의 비방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에게 의존했던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등에 의해 웅변술의 대가로 묘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연인 사이의 사랑에 대한 카운슬러였고 중매쟁이이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 메넥세노스(Menexenos)에서 그녀는 소크라테스에게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연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잔치’에 나오는 여인 ‘디오티마’처럼 사랑에 대한 연설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20대에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었을까?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 상당한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게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넥세노스의 기록을 그저 웅변술에 대한 패러디쯤으로 여겼던 것이죠. 그들은 아스파시아를 고대 희극작가들의 묘사처럼 “포주나 창녀” 정도로 여기는 것이 더 편했을지 모릅니다. 기껏해야 페리클레스의 정부였다는 것이 최고의 표현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고대의 어떤 공식적인 기록에도 나오지 않고 있죠.    


하지만 아스파시아가 ‘디오티마’처럼 웅변술의 대가이고 사랑의 전문가였음을 인정한다면 ‘잔치’에서 디오티마가 언급했던 개념들이 소크라테스가 주창한 철학과 삶의 방식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디오티마‘가 언급한 개념은 물리적 영역은 더 높은 이상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만족이 아닌 영혼의 가르침이 사랑의 궁극적인 의무이고, 일반적인 것이 특별한 것에, 영원한 것이 일시적인 것에, 이상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러한 개념들은 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죠. 이런 측면에서 아스파시아를 허구적인 ‘디오티마’와 동일시하는 것은 철학사의 일대 센세이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댄구어 교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며 두 여인을 동일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두 연인의 동일화를 거부해온 것은 여성들의 지위와 지적인 능력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지적인 여인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 여인에게 인간적인 사모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의 대화 속에서 그 여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면, 아스파시아라는 여성은 서영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듯 영민한 여인을 사랑한 소크라테스는 더욱 낭만적인 현자로 기록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옆자리에 앉은 아스파시아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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