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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3. 2021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사실일까?

서양철학의 토대를 세운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고전 연구가인 디스킨 클레이(Diskin Clay)는 200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플라톤의 질문들’(Platonic Questions)에서 플라톤이 기술한 소크라테스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묘사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비천한 가문의 출신으로 가난하고 못생겼으며 악처인 크산티페와 결혼한, 영민하지만 논쟁의 대상이 된 철학자의 이미지로 고착되었던 것이죠. 플라톤은 크세노폰(또 다른 소크라테스 전기 작가)과 함께 기원전 423년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기원전 469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그의 노년 시절이었죠. ‘새로운 신을 만들고’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는 당대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난에서 그를 변호하기 위해 두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위대한 스승이자 윤리적 사상가로 묘사했고  그를 육체적 쾌락을 넘어서 더 높은 교육적 목적에 헌신한 인물로 숭앙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이상화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그의 철학의 탄생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미지를 교정하려 했지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였고 서양 최초의 음악 이론서를 펴낸 아리스토크세누스(Aristoxenus)와 또 다른 추종자 클레아르코스(Clearchus)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알게 된 소크라테스에 대한 몇몇 단편적 사실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10대 시절 당시의 유명한 노 철학자 아르케라우스(Archelaus)와 연인 관계였으며, 크산티페 이전에 미르토(Myrto)라는 이름의 귀족 집안의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현명하고 아테네에서 영향력이 컸던 지성적인 여인 아스파시아(Aspasia)와 연인 관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필자의 브런치 글 ‘소크라테스 인 러브’ 참조) 이러한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육체가 아닌 정신의 우월성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언급이 맞는다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르게 됩니다. 즉 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아테네의 젊은이였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달라진 배경 속에서 그가 겪은 개인적 경험들이 이후 아테네 인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킨 새로운 형태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한 두 세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들이 감히 스승인 플라톤의 언급과 상반되는 언급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첫 번째 대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으로부터 직접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그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0년 간 플라톤 아카데미의 일원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사실들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대의 저자들이 플라톤 이외의 구전되거나 기록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는 기인(奇人)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청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린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공공장소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하죠. 플라톤은 이러한 이야기를 별다른 언급 없이 기록했지만, 소크라테스가 들었다던 목소리를 ‘신성의 조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씩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명상 능력에 경외심을 표명했죠. 반면 의사의 아들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의학적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다른 사상가들처럼 ‘우울병’(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melancholy’)을 앓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최근의 의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강경증’(catalepsy: 발작 등에 의한 근육의 경직)으로 알려진 증상과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소원함을 느끼게 했고 이로써 다른 형태의 삶의 방식을 시도하게 했으리라는 추론입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삶과 성장배경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면 그의 사상은 어떠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이른바 ‘형식 이론’ 관련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윤리학에 천착했죠. 그는 자연의 세계보다는 윤리적인 문제에서 보편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는 ‘정의’(定義, definitions)를 주장한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플라톤은 이 원리를 받아들였지만 보편적인 것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실체에 적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지된 많은 것들을 단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것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니까요.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실체를 ‘형식’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견해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생물학자면서 과학자였던 그는 세상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에 관심을 기울였죠.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을 무시하고 그대신 보편성에 대한 논리적 설명과 그것들의 특정한 물리적 실체들로 대체하였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묘사했던 것보다 더욱 현실적인 사상가였던 것이죠.     


서기 5세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인 키루스(고대 그리스의 도시)의 시어도어(Theodoret)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에 따르면 적어도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양성애자였습니다. 그들은 플라톤의 대화 카르미데스(Charmides)에서 소크라테스가 젊은 남자의 벗은 가슴에 강렬한 감정이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플라톤이 기술한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아내는 크산티페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70세였을 때 크산티페가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녀가 50대의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그 이전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도 명확한 기술이 없는 것이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귀족 출신 아내 미르토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고위층과 연관된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인식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한때 아테네의 정권을 차지했던 반민주적 귀족들과 연계되어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받았던 재판을 위해 그의 출신을 숨겼을 개연성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플라톤에 의해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젊은 시절에 웅변술의 대가이며 연애 상담가였던 아스파시아와 교제하였고 그녀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와는 전혀 다른 소크라테스를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실제 모습은 결코 확인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의 제자들인 아리스토크세누스나 클레아르코스의 언급에 비추어 우리는 인간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상적 형성에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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