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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5. 2021

크산티페를 위한 변명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배우자는 악처로 이름난 크산티페였습니다. 다른 기록에는 소크라테스가 귀족 집안의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왜 크산티페만이 못된 아내의 대명사가 되었을까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침실용 변기통을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들이부었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응은 “천둥이 치면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고 했다던가요. 우스개처럼 들리는 그 얘기 하나만으로도 크산티페의 악처 이미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여겨지는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하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터이니.”    

또 다른 옛말도 있지요. “고대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 뒤에는 그의 뻔뻔스러운 배짱을 미워한 여성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의 주인공에 가장 들어맞는 인물은 소크라테스였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전장에서 돌아온 50대 이후의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기인이 되어있었습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거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소리 높여 외치는 괴상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그런 그의 곁에 크산티페가 있었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크산티페를 악녀로만 묘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돈’(Phaedo)의 첫 부분에서 그녀를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에서 크산티페는 심한 잔소리와 거친 성격으로 소크라테스를 괴롭힌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글을 통해 악처 크산티페를 위한 몇 가지 변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참 함께 살기 어려운 남자였을 겁니다. 아마 대화조차 쉽지 않았을 에요. 이런 대화를 상상해보세요.     


“소크라테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참 행복하네요.”

“당신이 행복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어디 내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보시지.”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 있잖아요. 소크라테스는 사소한 이야기조차 철학적 논쟁으로 바꾸어놓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물론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요.     


크세노폰의 기록 중에도 플라톤의 ‘잔치’(Symposium)와 같은 제목의 글이 있어요. 그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크산티페와 같은 악처를 어떻게 참고 사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전문적인 승마 기사가 꿈이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온순하고 훈련된 말을 마다하고 사납고 거친 말을 타려고 했습니다. 그런 말로 훈련을 하면 다른 말들은 쉽게 다룰 수 있으니까요.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와 결혼한 이유를 그것에 비유합니다.     


“내 경우도 그와 같지. 나는 인간을 다루고,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길 원하네. 그러니 내가 그런 아내를 고른 이유는 한 가지야. 그녀의 거친 기질을 참아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무척 쉬워질 테니까.”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런 이유로 아내를 선택한 남자를 좋아할 여자가 과연 있을까요?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돈벌이에 전혀 무관심했어요.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니까요. 진정한 철학자가 원하는 유일한 대가는 지혜와 진리의 추구였던 것입니다. 플라톤의 ‘변명’(Apology)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가난을 수없이 되풀이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목격자가 있지. 그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Nocomachean Ethics)에서 지식 추구의 목적은 행복한 삶에 있다고 말하면서,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식탁 위에 빵이 놓여있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철학자든 아니든 호구지책은 중요한 문제이니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아내라도 그러한 남편을 존중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에게 경제적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설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의 이름 ‘람프로클레스’(Lamprocles)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장남이 태어나면 친가 쪽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관례였지만 예외적으로 외할아버지의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부유할 경우에는 그 름을 따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처갓집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은 오직 지혜의 추구에 나선 괴팍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크산티페가 조금 큰소리를 친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였을까요?    


오늘날 ‘심포지엄’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특정 주제를 다루는 학술 모임을 가리키죠.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종의 철학자들의 사교모임이었어요. 그곳에서 참가자들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죠.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의 글 ‘심포지엄’을 우리말로 ‘잔치’ 혹은 ‘향연’이라 번역한 이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들과 함께 늘 이 모임에 참가하였죠. 다시 말해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곳은 여성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니 크산티페는 집에서 술 취해 돌아올 위대한 철학자를 기다릴 수밖에요. 혹시 모르죠. 크산티페도 집으로 다른 철학자들의 부인들을 초대해 레스티나 와인을 마시며 남편들 뒷 담화에 열을 올렸을 지도요.    


더 끔찍한 일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를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요. 그것도 다른 남자를요. 소크라테스도 인정한 것이지만, 그는 젊고 잘생긴 장군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 간의 육체적, 정신적 사랑은 흔한 일이었어요.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사랑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언급합니다.     

“당신과 나는 공통의 느낌을 가지고 있소. 우리는 연인이니까. 우리는 제각기 두 가지 사랑을 가지고 있지. 나는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알키비아데스와 철학을 사랑한다오.”     


알키비아데스 역시 플라톤의 ‘잔치’에 등장합니다. 이 젊은 장군은 잔치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이 얼마나 소크라테스를 사모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유혹하려 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지혜를 얻고자 했겠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값싼 흥분감으로 철학을 거래하지는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알키비아데스와 간통을 저지르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이 온 도시를 돌아다니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크산티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플라톤의 ‘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 처형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그의 옆에서 간수가 미나리 독을 술잔에 섞고 있었죠. 친구들이 감방으로 몰려들 때, 크산티페는 남편의 곁에 앉아있었습니다. 품에 막내 아이를 안고 말입니다. 그녀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남편에게 말했죠.     


“오, 소크라테스. 이제 당신이 친구들과, 그들이 당신과 대화하는 것도 마지막이 되겠군요.”    


아무리 못난 남편이더라도 크산티페는 여전히 그의 아내였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죽음에 초연했지만 악처라 비난받던 그의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비극적 운명에 슬픔을 누르지 못했죠. 그런 그녀에게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내와 갓 난 자식에게 위로의 키스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옆의 친구에게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무뚝뚝하게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크산티페는 흐느끼며 감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을까요? 아니면 죽기 전에 모여든 무리들과 한 번 더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싶어서였을까요? 어떤 이유에서 든지 간에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인물이었다면 아마 오래전에 이혼을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위대성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읽을 때마다 크산티페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 철학이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 지고한 목적을 위해 희생당한 한 여인을 기억해야 하니까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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