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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01. 2021

전사(戰士) 소크라테스

이아인 킹(Iain King)은 국제정치와 전쟁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한 영국 작가입니다. 한 때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에서 연구 활동을 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죠. 그는 민간인으로서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등지에서 U.N. 활동에 참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몇해 전  이아인 킹은 ‘전쟁과 사상가들’(Thinkers at War)이라는 시리즈 글을 통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12명의 정치가와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쟁으로 인해 그들의 삶과 사상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고찰했습니다. 그중 소크라테스에 관한 그의 글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한 때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군사적 경험은 철학에 대한 그의 혁명적 접근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하지만 그의 군 생활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역사 상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는 단지 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풍자가 한 사람, 역사가,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수제자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기록은 달랐지요.    


아리스토파네스는 풍자적인 희곡작가였습니다. 기원전 423년에 쓴 그의 희극 ‘구름’(The Clouds)에서 그는 소크라테스를 조롱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전사가 아니라 비애국적인 인물로 묘사했던 것이죠. 그 모욕적인 평가는 24년 뒤 소크라테스 재판 때 배심원들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역사가였던 크세노폰이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소크라테스에게 호의적이었고 세 번째 사람이었던 플라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전선에서 보여주었던 소크라테스의 용기를 찬양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20대에 2년 간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밀집군의 일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요. 창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장갑 보병으로서 그는 방패를 들고 30kg에 달하는 갑옷을 착용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당시의 장비는 병사마다 조금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전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시기 소크라테스는 잠시 국경 지역에 배치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군 생활은 아테네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첫 교전을 치른 것은 그로부터 십여 년 이상이 지난 기원전 432년 포티다에아(Potidaea)라는 곳에서였습니다. 그곳은 아테네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꿈꾸던 도시국가였죠. 이미 37세의 나이였던 소크라테스는 초기의 전투와 이어진 포위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아테네를 떠난 지 3년 만에 그의 부대는 승리를 거둔 뒤 귀환 중이었습니다. 스파르탈로스 부근을 지나던 중 아테네 군은 매복 공격을 당해 심각한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구한 것이 바로 이 전투에서였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후 아테네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가 되었지요.    


포티다에아에서 돌아온 5년 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때 소크라테스는 델리움(Delium) 전투에 참가합니다. 기원전 424년에 치러진 이 전투는 역사 상 최초의 동족상잔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지요. 오늘날 ‘우군에 의한 포격’(friendly fire)이라 불리는 상황에서 아테네 군들은 적군인 보이오티아(Boeotia) 군을 식별하지 못하고 아군들끼리 전투를 벌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퇴각 중에도 대형을 유지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기록했죠. “전쟁에서 그와 같이 한다면 적은 결코 가까이 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단지 황급히 도주하는 병사만을 추적할 뿐이니까.”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라케스(Laches)는 더욱 높이 평가했어요. “모든 아테네 군들이 소크라테스만큼 용감하게 싸웠다면 보이오티아 군은 결코 어떤 승리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전투는 암피폴리스(Amphipolis)에서였습니다. 이미 48세에 가까워진 그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두었고, 얼마후 아테네와의 휴전이 이루어졌지요. 이렇게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끝이 니다.    


*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445)은 스파르타가 맹주를 맡고 있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보이오티아 등이 아테네가 맹주를 맡고 있던 델로스 동맹과 벌인 전쟁이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삼십 년 평화 조약’(기원전 446년-445년)을 비준함으로써 끝이 났다.     


소크라테스는 평균 이상의 신체 조건을 갖춘 아테네 인들과 마찬가지로 밀집군의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나섰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시민권을 규정하는 확실한 요건이었습니다. 전선에서의 전투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소크라테스의 전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감했고 때론 무모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담성은 그의 철학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아테네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고 전파하는데 큰 용기를 보였으니까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아테네의 이상에 의해 고취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접점에 전쟁에서의 경험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터에서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옹호했던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 지극히 호전적인 논쟁가로 돌변했지요. 외적인 모습의 변화와 함께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사상에 치열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어떤 아테네 인들에게는 매우 거북스러운 것이었고 심지어 미친 짓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전쟁을 마친 뒤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도 급진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급격한 변화가 순전히 전투에서의 경험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가능성도 있죠. 지난 세기의 현대전을 겪은 후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 전염병처럼 널리 퍼졌으니까요.    


소크라테스의 전쟁 경험이 그의 사상에 미친 가장 분명한 영향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재판 중 그는 자신의 군대 기록을 내세워 애국심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산되자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아테네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증명하였죠. 이 전사-철학자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명성과 영향력을 죽음으로써 지켜낸 철학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당당한 아테네의 전사였습니다. 그것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거리에 섰던 노년의 소크라테스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전장을 누볐던 소크라테스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도 혁신적이었습니다. 그의 변화가 전쟁의 후유증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아테네의 퇴락한 정신에 과감히 도전한 사상적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아테네를 사랑했지만 전쟁만큼 치열하게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전달했습니다. 죽음을 불사한 철학의 전사(戰士)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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