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길!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문학의 정점에 있는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러시아 남부 툴라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뜨자 친척의 손에 양육되었다. 성장해서는 카잔 대학에서 법학과 동양어를 공부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태와 방종의 시간을 보낸다. 1851년 도박으로 엄청난 빚을 지자 톨스토이는 형과 함께 코카서스로 가서 군에 입대한다. 이후 군에서 나온 그는 유럽을 여행 중 1857년 파리의 거리에서 공개처형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게 되고 그의 무정부주의와 비폭력주의 사상의 근원이 된다.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톨스토이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국가는 그 시민들을 착취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을 부패시키지... 그런 고로
나는 결코 어디에서든 어떤 정부도 섬기지 않을 것이야. “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인도의 사상가 마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간디는 톨스토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충고를 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870년대 톨스토이는 심각한 정신적 변혁과 깨달음을 경험한다. 이는 그의 논픽션 작품 ‘고백’에 잘 드러나고 있다. 예수의 ‘산상 수훈’을 중심으로 그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 자처하게 된다. 그의 비폭력 저항의 정신은 간디뿐 아니라 1950년대 미국의 흑인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톨스토이는 20대에 자신의 자전적 3부작 소설,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1852-1856) 그리고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세바스토폴 소묘’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를 러시아 현대문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작품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다룬 ‘전쟁과 평화’(1869), 그리고 유부녀와 기병장교의 사랑, 배신, 믿음, 가정, 결혼, 욕망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제정 러시아의 사회상을 그린 ‘안나 카레니나’(1877)였다. 그는 장편소설 외에도 많은 단편과 중편, 희곡과 철학 에세이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자신의 생활을 통제하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밤 열 시 취침, 아침 다섯 시 기상. 낮잠은 두 시간 이상 자지 말 것. 소식하고, 단 음식은 피할 것.” 그는 또한 그의 내면에 들끓던 욕망을 통제하려 애쓴 흔적도 보인다. 사창가는 한 달에 두 번으로 제한. 도박 습관에 대한 반성... 그는 자신의 생활과 정신의 틀을 바로 세우려는 젊은 시절 노력의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1862년 톨스토이는 34세의 나이로 만난 지 몇 주 밖에 되지 않았던 18세의 소녀 소피아 베르와 결혼한다. 그녀는 궁정 의사의 딸이었다. 그 해 톨스토이는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의 저술을 시작하고, 1865년 초고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고치고 또 고치는 긴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의 어린 아내는 악필로 유명한 남편의 원고를 다시 원고지에 옮긴다. 때로는 그의 휘갈긴 글씨와 여백에 멋대로 적어놓은 글들을 이해하기 위해 돋보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7년여에 걸쳐 그녀는 톨스토이의 원고 전부를 무려 여덟 번이나 다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 작업 중에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13명의 자녀 중 4명을 출산하였고, 집안일은 물론 출판사와의 업무도 그녀가 도맡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부부간의 갈등은 결혼식 전 날 밤 톨스토이가 혼전의 방탕하고 타락했던 자신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를 읽도록 그녀에게 강요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 점차 영적인 문제에 몰두한 톨스토이는 점점 더 가정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소피아는 남편의 재정 관리는 물론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져야 했고, 남편의 변화무쌍한 기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톨스토이의 제자들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집안에 함께 기거하게 되고 남편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듯 자신의 신발을 직접 수선하는가 하면 남루한 농부의 옷을 걸치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한 모습에 분개한 소피아는 남편에게 집안의 재정적 파산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작품의 판권을 자신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사실 톨스토이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삶을 좋아했었다. 그는 시골에서 주로 생활하였고 맨 발로 주변을 걸어 다니고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가 소피아에게는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1910년에 이르러 82세의 톨스토이는 아내와의 불화로 결국 한 밤중에 딸 하나를 데리고 집을 나간다. 여동생 소유의 작은 땅에 정착할 생각이었으나 그가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은 당시의 언론을 들끓게 했다. 러시아 최고의 지성이자 대문호로 추앙받고 있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집을 나간 며칠 뒤 그가 한 기차 정거장에 나타나자 카메라를 든 언론사의 보도진과 엄청난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의 아내 소피아도 그들 중에 있었다. 이미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진 톨스토이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폐렴에 걸려 그 해 11월 20일 세상을 떠난다.
미국 감독 마이클 호프만은 자신의 영화 ‘마지막 정거장’(The Last Station)에서 톨스토이의 말년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서 소피아는 여전히 위선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톨스토이의 악필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48년의 세월 동안 그와 함께 한 삶의 동반자였다. 영화 속에서 호프만은 톨스토이와 소피아에게도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사랑과 헌신으로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 현대문학의 중심인물로 당대의 많은 지성들의 스승이었던 그도 결혼생활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톨스토이는 언어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영어와 불어, 독일어까지 능통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집 서재에는 39개국 언어로 써진 23,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하니 그의 지적, 정신적 탐구의 노력은 특히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당대의 많은 작가와 교류하고 그들을 흠모하였던 것에 반해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만은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는 심지어 ‘그를 견딜 수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한다. 단편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는 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그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50의 나이에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선언했던 톨스토이, 노벨상에 대한 거부감으로 후보 명단에서 자신을 빼주길 요청했던 러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톨스토이. 그는 전 세계에 걸쳐 그의 작품을 사랑한 독자들과 끝없이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엄격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정신의 고양을 위한 끝없는 수행의 길을 걷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는 여전히 그의 소박하고 순수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고 한마디를 해야 한다면, 난 그저 이렇게 말할 거요: 신의 이름으로, 잠시 멈춰 서, 일을 중단하고, 주변을 돌아보시오.”
세상에 살아있던 그 마지막 해에 추운 간이 기차역에서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병든 몸을 기대고 죽어가던 그의 모습이 책장에 꽂힌 그의 ‘전쟁과 평화’와 오버랩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