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의 신 바츨라프 니진스키, ​자유를 향한 광기

강릉 인문독서 아카데미 강연 원고(2)

by 최용훈

“10년 동안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묵 속에 가려진 광기와 방황의 삶”

-리처드 버클


폴란드 출신 러시아의 바츨라프 니진스키(1890~1950, Vatslav Nizhinskii)는 1890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무용수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용을 배운 그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무용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받게 된다. 8년간의 고된 훈련을 마친 뒤, 그는 마린스키 황실 발레단에 입단하고 18세의 나이로 주인공의 역할을 맡게 된다. 당시의 남성 발레리노로서는 드물게 그는 발끝으로 서는 앙 푸앵트(en pointe)라는 발레 자세를 취할 수 있었고, 중력을 무시하는 도약으로 관객들의 주의를 끌었다. 어느 날 그는 당시의 남성 무용수들이 입던 반바지를 벗고 오늘날의 발레리노 의상과 비슷한 타이즈를 입은 채 무대에 등장한다. 관객의 야유와 함께 극단에서 축출된 후, 니진스키는 러시아의 예술을 유럽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던 발레 후원자 디아길레프를 만나 당시의 대표적인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와 더불어 유럽 무대에 데뷔한다. 니진스키의 인기에 힘입어 디아길레프는 발레 루스(Ballet Russe)라는 발레단을 조직한다. 그리고 러시아 최고의 안무가로 꼽히던 미셀 포킨이 동참함으로써 발레 루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단으로 자리를 잡는다.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니진스키는 발레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20세기 초반 여성 발레리나 중심의 발레무대에 남성 발레리노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그의 안무들은 최초의 현대적 발레 작품들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안무가로서 그의 첫 무대를 선보인 것은 스물두 살 때였던 1912년이었다. 그의 첫 안무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이었던 말라르메의 시에 드뷔시가 곡을 만든 ‘목신의 오후’였다. 숲과 사냥과 목축의 신인 목신(牧神) 폰느(Faune)가 나른한 낮잠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일곱 요정이 부근의 물가로 목욕을 하러 온다. 잠에서 깬 목신이 그들을 유혹하기 위한 몸짓을 하자 놀란 요정들은 황급히 도망을 간다. 그런데 그중 한 요정이 남아 목신과 에로틱한 분위기의 춤을 추고, 자신이 걸치고 있던 스카프를 떨어뜨린 채 떠나간다. 요정이 사라지자 목신은 그녀의 스카프를 집어 들고 혼자만의 춤을 춘다. 파리에서 초연된 불과 10분 남짓한 이 발레 소품에서 타이즈 차림의 니진스키는 하의 가운데 부분을 포도송이 모양의 소품으로 장식한 파격적인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 모습만으로도 당시의 관객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관객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요정이 떠난 후 홀로 남은 목신이 스카프를 몸에 두르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노골적인 몸짓을 했던 것이다. 이 문제의 공연은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카로 지의 편집장이 사설에서 외설로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파리 발레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결국 파리 경시청에 의해 공연이 금지된다. 하지만 무용에 관심이 많았던 조각가 로댕은 공연 후 분장실로 니진스키를 찾아와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커다란 논쟁 속에 니진스키는 안무가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게 되고 이후 발레 루스의 안무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안무 작품은 안무가로서의 그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것이었다.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은 스트라빈스키 작곡의 ‘봄의 제전’이었다. 이 공연은 막이 오른 직후부터 관객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대 뒤의 니진스키는 관객들을 향해 제발 공연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발레 공연에서는 볼 수 없던 이상한 의상, 발을 굴러대는 파격적인 안무, 불규칙적인 비트와 불협화음 등 당시의 관객들은 이 실험적인 작품에 도무지 공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120회 이상의 리허설을 거쳤던 ‘봄의 제전’은 ‘봄의 학살’이라는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난을 받으며 파리와 런던에서 단지 8회의 공연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름다움으로부터의 자유, 우아함에 맞선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늘날 많은 발레단에 의해 리바이벌되고 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더불어 모더니즘 발레의 선구적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전적 발레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신만의 무용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이 공연의 실패로 꺾이고 만다. 디아길레프는 지나치게 실험적인 니진스키의 안무가 발레 루스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고 이미 결정된 작품들의 안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 실의에 빠진 니진스키는 발레 루스의 남미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긴 항해에 오른다. 그 항해 중에 그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니진스키의 공연을 보고 그에게 반해버린 헝가리 귀족의 딸 로몰라 드 풀츠스키가 그 유람선에 동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니진스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 발레를 배우기도 했지만 니진스키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발레 루스의 공연 일정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남미 행 선박에 승선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긴 항해의 끝에 니진스키와 로몰라는 결혼에 이르게 된다. ‘봄의 제전’이 공연되었던 바로 그 해의 일이었다. 항해 공포증으로 순회공연에 참가하지 못했던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 대노하여 그를 발레단에서 해고해 버리고 만다. 사실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는 발레단의 단장과 수석무용수의 관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많은 남성 무용수는 후원자와 동성애적 연인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썼던 그의 일기 속에서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디아길레프가 처음부터 싫었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발레 루스를 나오고 난 뒤 니진스키는 아내의 나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1914년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국적이었던 니진스키는 헝가리 당국에 의해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가택에 연금된다. 전쟁 후 연금에서 풀려난 그는 1906년 4월 미국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오랜 감금의 생활로 피폐해진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의 도움으로 1907년 남미 공연에 오르지만 그때는 벌써 정신분열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그 공연 이후 니진스키는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오로지 춤만이 삶의 이유였고, 춤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던 이 위대한 발레리노는 그렇게 춤의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헝가리로 돌아온 니진스키의 여생은 정신분열로 인한 암흑과 좌절로 점철된다. 1919년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일기를 쓴다. 1919년 1월 19일에 시작해 3월 4일로 끝나는 그의 일기는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광적인 기록은 1936년 그의 아내에 의해서 편집된 채 출간된다. 그 일기는 그의 병적인 성적 집착, 아내와의 불화,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등이 생략된 채 마치 위대한 예술가의 선언처럼 포장되어 그의 생전에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후 1979년 그 원본이 재출간된다. 춤의 신이라 불리던 니진스키는 그렇게 30년의 세월을 춤 없는 환상의 세계를 더듬다 1950년 신장 장애로 런던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1953년 파리의 몽마르트르 묘지로 이장된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없던 그 광기의 삼십 년 동안 그는 춤과 함께 살았던 이전의 삼십 년을 더듬었을 것이다. 춤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던 한 천재의 삶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고, 그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그는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자유로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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